생활 철학. 난 체제를 비판하지만 부정하지는 않는다. "처칠이 했다는 닳고 닳은 말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는 가능한 모든 체제 중 최악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것도 이것보다 낫진 않다는 데 있다.(지젝)" 이말은 비판은 하지만 그래도 이만한 체제가 없다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인간의 욕망과 소비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서서히 그 정당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은 이미 자본주의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유럽이 중도를 지향하는 이유이다. 부정은 헤겔의 변증법의 핵심이지만 울나에서 부정은 곧 위험한 인물, 문제가 있거나 실패한 사람이라거나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다. '부정적'이라는 말은 빨갱이가 그렇듯이 자기와 대립하는 아무나 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문제있는 인간 쯤으로 매도하거나 뒤집어 씌우는 프레임으로 사용되기 쉽다. 이는 까딱하면 비판이나 비평에 대해서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가 그렇듯 정치적으로는 인간들을 차별하는데에 곧바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울지 않으며 분노하지도 슬펴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척 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부정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모두 부정적이라는 범주에 집어 넣는다. 그러면서도 비난에는 또 자신의 이기에 따라 지나칠만큼 예민하다거나 둔감한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부정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울나는 거의 일세기를 식민지배와 극우독재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비평문화가 자리잡지도 용인되지도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지나친 우익화로 인한 이 사회비평의 부재 자본주의정신에 대한 맹종으로 그래서 현재 젊은이들의 비판적 사유능력과 성찰과 질문(자신의 행동과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관습과 제 도에 대해서 의심할 줄 아는 능력)의 부재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예심리란 그것이 돈이든 욕망이든 거기에 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어떤 속박을 떠날 수 있을 때, 이는 나를 붙들고 있는 이 땅 이 체제를 떠날 수 있을 때 (즉 부정할 수 있을때, 아니오가 허용될 때) '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어떤 믿음 어떤 사람 어떤 우상 어떤 물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