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근교 ‘한국·필리핀 우호센터’에는 직업훈련교육원과 한국전쟁기념관이 있다. 우리 정부가 우호증진·보은 목적으로 건립한 이 시설의 외형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을 본떴다. 많은 필리핀인이 이곳에서 한국어 강좌 수강, 기술자격 교육을 받는다.  맞은편의 한국전쟁기념관에는 6·25전쟁 발발부터 필리핀군 참전 과정 자료, 전사자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전사자 추모비에는 한국의 자유를 지켜주고자 고귀한 목숨을 바친 116명의 전몰용사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72년 전 알지도 못했던 한국인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필리핀은 우리에게는 고마운 나라다. 참전자 후손의 전쟁유적지 발걸음 발랑가 전쟁기념관장 안젤리카(Angelica)는 20년 동안 바탄반도 유적지를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맞이한 베테랑이다. 과거에는 내외국인 참전자 단체팀 방문이 많았으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할아버지·아버지의 전쟁터 현장을 꾸준히 찾아오고 있단다. 안젤리카는 대학 졸업 시에는 전쟁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유적지 답사와 많은 참전자 증언을 통해 지금은 태평양전쟁 역사를 꿰뚫고 있다. 마닐라에서 코레히도르 요새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야기하자, 새로운 답사코스를 알려준다. 바탄반도 끝단의 항구도시 마리벨레스(Mariveles)에 가면 코레히도르행 배편이 있단다. 항구에서 섬까지는 30분 거리다. 특히 마리벨레스는 ‘죽음의 행진’ 출발점으로, 그곳 표지석에는 ‘0㎞’로 표기돼 있단다. 새로운 유적지로 가는 대신, 기념관 2층에 쌓여 있는 바탄전투 사진 자료로 당시의 전쟁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난공불락의 ‘드럼 요새’ 기념관 자료 중 코레히도르섬 근처 ‘드럼 요새’ 사진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코레히도르 점령으로 사실상 필리핀 초기 전투는 끝났다. 하지만 최후 순간까지 미군이 저항한 ‘드럼 요새(Fort Drum)’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00여 년 전 미국이 건설한 이 요새는 바다 위의 바위섬을 깎고 시멘트를 퍼붓는 10년 공사 끝에 1919년 완공됐다. 전함 모양의 거대한 진지는 길이 106.7m, 폭 43.9m, 물 위로 12.2m 솟아 있다. 견고한 강철과 콘크리트 옹벽 속에는 14인치 화포 4문이, 외부에는 소구경 화포와 대공포를 설치했다. 외양이 군함과 똑같은 이 불침 요새는 지나다니는 선박이 실제 함정으로 오인해 수시로 신호를 보내왔다. 240명이 거주했던 이곳은 식수 부족과 사격 목표 관측 제한의 약점이 있었다. 전쟁 중 일본군은 이 요새에 두 달 동안 소나기 같은 포격을 줄기차게 퍼부었다. 그러나 미군 피해는 단지 부상자 4명뿐이었다. 1942년 5월 7일 코레히도르의 웨인라이트 중장이 ‘항복하라’는 지시문을 보내왔다. 즉각 화포의 주요 부품을 제거해 폐기했고, 모든 포탄과 장약은 바다에 빠뜨렸다. 일본군이 드럼 요새를 점령했을 때, 재사용이 가능한 장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으로 생긴 한국·필리핀 ‘우정의 탑’ 발랑가에서 시외버스로 쿠바오(Cubao)에 가서 다시 마닐라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도로 정체가 심했지만, 승객들은 차내 TV의 미국 영화를 시청하면서 지루함을 달랜다. 필리핀인 대부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물론 모국어인 타갈로그(Tagalog)어도 공식 언어다. 필리핀인의 영어 능력은 해외 취업 때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력을 갖는다고 한다. 마닐라 리잘 공원에는 한국·필리핀 수교 60주년인 2009년 건립된 ‘우정의 탑’과 ‘추모와 평화기원의 탑’ 조형물이 있다. 6·25전쟁 당시 필리핀군 파병에 대해 감사하고 태평양전쟁 한인 강제징용자를 추모하는 탑이다. 이처럼 한국과 필리핀 인연은 전쟁에서 시작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전쟁기념관과 참전용사 사연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각 안보리 결의(제1511호)를 통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세계 각국에 지원을 호소했다. 당시 필리핀은 자국 내 반란군(공산군)과의 교전으로 군대를 파병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10개 지상군 대대 중 최정예 부대인 제10보병대대를 주축으로 전투단을 편성해 한국으로 보냈다. 1950년 9월 19일 미국·영국에 이어 필리핀군 1367명이 세 번째로 부산항에 도착했다. 1992년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라모스(Ramos)도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연 참전 인원 7420명 중 전사자 116명을 포함해 46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념관 전시실의 전사자 가족 증언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곤라도 얍(Conrado D. Yap) 대위는 어린 딸을 둔 기갑장교였다. 그는 1951년 4월 23일 임진강 부근에서 중공군 대공세를 저지하다 전사했다. 남편의 전사 소식에 젊은 아내는 까무러쳤다. 그녀는 홀로 남은 딸 아가논(Aganon)을 위해 평생 자신의 삶은 포기했다. 어엿하게 장성한 딸이 어머니와 1993년 한국을 방문한 후 남긴 소감이다. “서울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는 순간 엄마와 자신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왜 목숨을 바쳤는지 어린 시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은의 꽃다발을 안겨주는 학생과 한국인들의 따듯한 환대에 그 슬픔은 사라졌다. 오히려 오늘의 한국이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준 아버지 희생이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한국·필리핀의 어제, 오늘과 미래 마닐라 공항 부근에는 필리핀 항공우주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내 항공역사를 보면 과거 필리핀의 과학기술 수준은 한국보다 훨씬 앞섰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마닐라 리잘 공원 위를 필리핀 최초의 항공기가 비행했다. 운집한 시민들은 열광했고, 변화하는 세상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밀려오는 외세에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1930년대 필리핀 인구 중 27%가 영어를 사용했고,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10만 병력을 유지했다. 1970년대 초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경제 2위 국가였지만,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오늘날 방위산업 분야에서 필리핀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산 지상무기·군함·항공기 도입에 이어 잠수함까지 검토하고 있다. 또 한국 군사학교에서 다수의 필리핀군 사관생도와 장교들이 수탁 교육 중이다. 육군사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페로리노(Ferrolino)는 “군사 강국 한국에서의 생도 생활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졸업 후 양국 군사협력의 가교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m/20220711/1/BBSMSTR_000000100142/view.do?nav=0&nav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