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바기오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올티가스로의 이동은 바기오에서 딸기를 따던 농부가, 올티가스에서 멋진 바롱을 입고 은행에 출근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기오 어학원의 교육비와 기숙사비가 4주 116만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1페소에 25원 하던 시절이니 116만원이면 약 46,400페소. 세미퍼니쳐가 구비되어있는 원룸타입을 월 15,000페소에 얻었고, 올티가스내 어학원 일대일 수업이 시간당 250페소여서, 하루 3시간(750페소 x 20일= 15,000페소) 수업을 하기로 하고, 집세와 수업비를 제외한 한 달 16,400페소의 예산으로, 필리핀 3달 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티가스에는 한국식당도 많고, 마트도 많아서 음식에 대한 큰 불편함은 없었고, 인프라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어서 생활의 불편함도 별로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메트로워크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며 밴드의 노래를 들을 때 내가 살아있음과 그리고 필리핀의 매력을 동시에 느끼곤 하였습니다. 아내는 리잘에서 지프니를 타고 올티가스로 통근을 하였는데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5시부터 전화영어를 시작하고 오후 2시에 마쳤습니다. 나는 아침 10시부터 1시까지 센터포인트 빌딩안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내가 일하는 타이쿤 빌딩 앞에서 쭈뼛쭈뼛 아내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아내가 빌딩 문밖으로 나오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내랑 졸리비 치킨조이를 먹으며 그렇게 평범한 데이트를 했습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나온 아내가 맛있는 것을 사준다며 한국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졸리비 치킨조이가 75페소 하던 시절이었는데, 한국 식당의 삼겹살 1인분이 250페소, 둘이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가격이 약 1,000페소. 필리핀에 대해서 잘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필리핀 노동자들의 월급이 대략 8,000에서 12,000페소 정도 받는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던지라, 아내의 입장에서는 1,000페소라는 돈이 손 떨리는 금액이었을 것인데, 아내는 월급 때마다 손을 떨지도 않고 얻어먹은 만큼 되갚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발현하여, 월급에 대해 물어보니, 명세서를 보여주더군요. 정확히 기억을 되짚어 보면, 기본급 14,000페소에 이것저것 인센티브가 붙어 약 20,000페소를 받고 있었습니다. 지각, 결근 없는 만근에 대한 인센티브, 전화영어 수강자와의 재수강 비율이 상당히 높아 그에 붙는 인센티브, 그리고 회사에서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채워 받는 인센티브 등등해서 그 정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아내는 회사안의 300명의 튜터들 중 매달 1, 2등을 다투던 그런 튜터였습니다. 매달 시상이 있는데 1등을 하면 500페소짜리 SM 메가몰 상품권을 2등을 하면 300페소의 상품권을 받아왔습니다. 그 상품권으로 메가몰 안에 있는 BREAD TALK 빵을 사먹던 아내의 모습은 풋풋한 여고생을 연상시켰습니다.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아내의 또 다른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더더욱 열심히 쫓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대학에서 IT 계열을 전공하고, 졸업 후 SHOPWISE에서 잠시 계산원 일을 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 상대적으로 월급이 많은 전화영어업계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늘 한국인 수강생들을 상대하니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동경심이 많았고, 그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문화, 음식, 유행 등등을 간접적으로 듣게 되었고, TV에는 한국드라마가 그리고 모든 가전제품 매장의 TV에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 보이고, 거기다 한국 남자와 데이트를 하니, 아내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꼭 한 번은 가고 싶은 그런 곳 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 때 코피노 문제가 필리핀을 강타했고, 속칭 황제골프관광을 즐기던 어글리 코리안들의 경거망동과, LA카페에서 벌어지던 필리핀 매춘부와 한국인 관광객 사이의 크고 작은 문제 등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첫 번째 직장이었던 어떤 전화영어 업체가, 필리핀 튜터들에게서 떼어간 SSS를 납입하지도 않고, 기습적인 폐업 후 야반도주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내와 필리핀 튜터들이 펑펑 울고, 구제받지도 못한 억울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사람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나와 데이트를 하면서도 마음을 쉽게 열지는 않았습니다. 어찌 떼먹을것이 없어서 그걸 떼먹고 도망을 갔는지, 한국인으로서 매우 창피하였습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