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사란 분이 출소과정에 대하여 쓴글입니다.
조중사란 분이 출소과정에 대하여 쓴 글이라고 하네요 판단은 회원님들의 몫으로...
우선 재판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제가 받은 재판의 숫자를 정확히 기억할수 없을 정도 입니다.
대략 50회 이상 받았습니다.
먼저 필리핀 재판에 관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것 같아 말씀 드리고 싶은 얘기는
필리핀 재판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재판이랑은 완전히 틀립니다.
한국서 생각하는 재판은 피고인이 선서를 하고 검사가 얘기를 하고 변호사가 그에대해 변호를 하고 고소인 과 대질신문 하고..
여러 주장들이 일어나고 등등등 시간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리고 하는....그런 재판들을 생각하실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과 현실의 필리핀 재판내용은 완연히 틀립니다.
전 5년 동안 50번 넘게 재판 받으며 한번도 재판중 제가 일어나서 어떤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하거나 나에 주장을 말하거나
통역관에게 판사나 검사가 뭘 물어봐서 나에 대답을 듣거나 말하거나 그런적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변호사 판사 검사 가 말을 주고 받고 하는 식의 재판이며 빠르게 재판이 끝날땐 출석상황만 확인후
5분이면 끝난 재판도 많았고 오래한 경우 최대 30분 정도 길게 재판이 이루어졌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길게 되었을경우 역시 판사가 증인 등에게 물어보고 하는 식의 재판이었습니다.
당시 2007년 변호사인 로널드 변호사는 저의 느낌은 저를 위해 많이 싸운 변호사였습니다.
초창기 재판할때도 그랬고 많이 저의 변호를 해주었으며 재판당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정확한 근거하에 저를 위해
변호를 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고 하고 저는 법앞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올리브 변호사는 전혀 그런모습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궁금한게 있어 전화를 해도 전화 조차 받지 않는 그런 변호사였습니다.
2009년 올리브 변호사를 선임을 하였는데 당시 저는 많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4년 동안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변호사, 교도소 안에서의 생활등 많은 돈이 들어갔었는데
한국 집안사정도 너무 힘들어 잠시 그런 도움들이 끊긴 상태 였습니다.
2009년 9월초 권사장님이 올리브 변호사를 처음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당시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 이어서 권사장님에게 국선 변호사를 선임 하자고 하였고 권사장님은 지금 모금운동도
잘되고 하니 변호사비는 걱정말고 한인회도 돕기로 했으니 걱정말라며 그리고 올리브 변호사가 능력있는 변호사니
잘될거라며 아무걱정 하지 말라며 자기가 책임질테니 그냥 선임하자 하여서 하는수없이 선임란에 싸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 결과는 권사장님은 변호사비도 지불하지않았고(총12만 페소중 7만페소를 페이 하였습니다)나머지 5만 페소와
재판시 히어링피 (재판시 3,000페소 *7회)2만 1천 페소도 주지않고 고스란히 구정서씨 에게 빛을 떠넘겼습니다.
재판 50여회를 넘게 받으며 당시 가장 스트레스 받던날들이 재판을 받고 난후 였습니다.
재판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진행되는것 뿐이란걸 알았습니다.
변호사 란 존재의 가치는 그냥 출석 이었고 통역관 역시 그냥 출석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시는 것 처럼 한국 재판 처럼 피고인,증인, 변호사, 검사가 그렇게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싸우고 변호하고
이렇게 진행되고 그래서 판사나 검사가 저에게 물어봐서 제가 대답하고 그런식의 통역이 필요하고 이런 생각들은 오해
인것입니다.
전 2006년 1년 동안 통역이 없어 재판이 재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재판시 어떤 말들을 하기위해 재판이 필요한게 아니라 재판 내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판사 ,검사,변호사 가 하는
말들을 이해 하기 위한 출석 을 위한 통역입니다.
2006년 1년 동안 제가 재판 이 계속 연기 되었습니다.재판을 받지를 못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영어나 따갈로그를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분명 저의 문제 입니다. 제가 체포 과정에서 영어만 제대로 구사 하였으면 이렇게 5년 이란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 것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나라에 살건 분명히 그 나라 언어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수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좋게도 될수가 있고 저처럼 5년 이란 시간을 감옥서 썩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옥서라도 언어의 중요성을 깨우쳐 지금은 따갈로그를 잘하는 편입니다.
필리핀 사람들과 편하게 따갈로그로 대화를 할정도가 되었습니다.
영어도 어느 정도는 됩니다.
2006년 1년동안 재판이 약 10회 정도 열렸는데 모두다 통역의 부재로 재판이 연기 되었습니다.
이는 판사가 안타까워 해서 직접 대사관,한인회,상공회의소에 전화를 걸어 "조광현 이란 한국사람이 피의자신분으로 재판을
받는데 통역이 필요하다, 통역이 없어 재판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영어나 따갈로그를 하는 통역을 지원해달라" 라고
직접전화를 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외국인이 재판을 받을경우 그 나라 대사관에서 통역 지원은 기본적으로 해줍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사관은 필리핀 현지 판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 통역 지원을 해달라 하는데도 감감 무소식 이었습니다.
거기에 전 1년 이란 세월을 그냥 헛되이 보냈습니다. 1년 이란 시간을.........
그후 돈을 지불하고 통역을 구했습니다.
말씀 드렸다싶이 통역은 그냥 출석을 위한 역할 뿐입니다.
1회 출석에 8천페소씩 지불 하였습니다.....
변호사도 있고 통역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떤 인터넷 내용에 제가 곧 나올것 처럼 내용들이 적혀 있던데 전혀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인터넷등에 적혀 있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다 읽었지만 전혀 사실과 무관한 내용들 입니다.
재판은 열렸지만 재판 내용은 전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를 바로 잡고 싶습니다.
그냥 그 전과 똑같은 재판 내용이었습니다. 출석 확인하고 변호사는 혼자 그냥 보석받아 달라 그런 말만 하고 검사는
다음 재판 까지 증인 출석 기다려 보자 라고 하고 판사는 다음재판까지 증인 출석 기다려 봅시다.라고 하고 재판 끝납니다.
이렇게 재판이 진행되며 다음 재판시 또 똑같은 재판내용이 진행되었습니다.
이게 5년동안 약 50회 재판 내용이며 10분 내외로 재판이 끝났었습니다.초창기 2007년 에는 조금 재판다운
재판이 이루어 졌었지만
그 이후로 계속 똑같은 내용의 재판이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인터넷 내용처럼 여러 말이 오고간 그런 화려한 재판 이라 생각하시면 오해 입니다.
재판 내용에 대해 뭐라고 자세히 말씀드릴 말이 없습니다. 항상 똑같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10분 내외로.....
출소 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면
전 2010년 9월 8일 필리핀 법원에서 60만페소에 보석을 허락한다.라는 보석서류를 받았고
10월8일 60만페소 보석금을 내고 정확히 4년 11개월만에 세상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9월8일 보석 서류를 변호사에게 받은게 아니고 구정서씨에게 받았으며 그후 한달 구정서씨가 백방으로 보석금을
마련해 10월 8일 금요일 출소 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 7월 15일쯤 처음 보는 사람이 면회를 왔습니다.
저를 돕고 싶다 했습니다. 당시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면회 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배고픔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잘 먹지 못해 영양실조 였습니다. 얼굴 및 목 주위에 허였게 가루 같이 버즘 같은게 생겼었고 체중도 53키로 정도
였습니다.
저도 저였지만 돈이 없어 애기가 아파 병원에 가지 못해 애기 엄마가 울고 그래서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2010년 3월 이후 아무도 면회도 오지 않았고 제가 꼭 도움 받아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도움 주기로
철석 같이 약속하던 분들이 이런저런 이유에 다들 외면하고....
무엇보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것은 사람들이 준 상처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주었던 희망 그것이 오히려 제게 독 이 되었습니다.
특히 제게 항상 다음 재판이면 넌 분명히 나오다 자신하던 한분....그러한 이유로 너무 큰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구정서씨 가 면회 오고 전 다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먼저 제가 출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현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경제적인 문제 점 들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약 5개월 밀려 있던 외상값도 다 갚아 주고 애기 병원비 도 주시고 밥 굶지 말라며 8만 페소를 주셨습니다.
그에 전 처음으로 애기에게 아빠의 조그마한 도리라도 한것 같아 마음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전 당시 식사때문에 너무 힘들었었습니다. 교도소 내에 밥은 개밥보다 못합니다.
냄새가 심해 처음 먹는 사람들은 구토를 합니다. 죽으로 하루 두끼 나오는데 소금 뿌려 먹거나 간장넣어서 먹어야 그냥 먹을수
있습니다.사람으로써 먹을수 있는 그런 음식이 아닙니다.
제가 교도소 있으면서 16명이 죽었는데 아파서 약을 먹지 못해 죽은 친구 들도 있지만 굶어 죽은 애들도 상당수 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이런 현실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이나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마닐라 교도소는 그게 현실 입니다.
제가 처음 독방간 사연도 음식 뺏어 먹다 싸워서 독방 갔었는데 교도소 수감생활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하루 한끼만 굶어도 힘든게 현실인데 전 그안에서 5년동안 배고픔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구정서 씨가 면회 오기 전까지 전 너무힘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자기가 값아 줄테니 외상밥 먹으라 해놓고 그래서 먹었는데 그 외상값도 안갚아 주시고
그래서 방장에게 매일 욕 먹고 돈 갚으라고 인상쓰고 욕하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거기 안에선 밥이 너무 형편 없으니 돈이 있으면 깐띤 밥을 사먹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식사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는 저 에게 밥 먹으라고 자기가 돈 주겠다고 해놓고 그것 조차도 주질 않으니
저는 사람에 대한 상처가 심했었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에 모든걸 해결해 주었으니 저에겐 너무 고마운 존재 였습니다.
이후 저에게 일주일에 1-2회는 면회를 꼭 와주어서 맞있는 음식도 가져와 영양 보충을 시켜 주셧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전 사실 자살 시도 도 많이 하였습니다.
희망이 없는데 살아갈 의욕을 잃어 버린 상태 였습니다.
재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며 애기도 아파 병원도 못가 애기엄마는 매일 울며 전화 왔고 전 배고픔에 너무 힘들었고
이상한 예감들도 들었습니다. 제 사건 경우 판사가 형량을 매길경우 20-40년 입니다.
만약 판사가 형량을 매겼으면 전 벌써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꾸 곧 판사가 형량을 매길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럼 전 아마 자살했을것입니다.
전 재사건에 대해 누구 보다 잘압니다.
재 사건은 검사의 재조사가 되지 않으면 보석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벌써 5년 이란 세월이 흘러 사건의 재 조사는 불가능 합니다.
구정서씨가 정말 힘써주신 일은 사건의 재 조사를 하게 해준 것 입니다.
당시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내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인 시계와 목걸이가 법원에 없다는 것을...
변호사와 그전에 제 일 보던 분들은 그런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른체 재판장에서 보석신청 받아 달라 조르고...
물론 저도 갇혀 있엇으니 모르는게 당연하였죠. 구정서씨가 검사에게 재조사를 강요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알게 되었고 그에 판사는 보석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석허락 서류를 받을때 변호사는 그것 조차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노발대발 하던데 그러면서 나중에 저한데 자기가 그렇게 만드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줄 아냐며 자기 자랑을
하는데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재판 날짜도 재대로 모르는그리고 내 전화도 안받는 그런 놈이 무슨 일을 했다고....
9월8일 보석허락되었다는 전화를 구정서씨 께 받고 다음날인 9월9일 면회 오셔서 서류 받는 순간 눈물이 절로 흐르더군요.
그토록 기다렸던 이 서류.......
5년 가까운 시간을 이 서류를 받기 위해 그토록 기다렸는데 그 기분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그토록 받고 싶었던 서류라 보고 또 보고 해도 너무나 값진 서류 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석금 60만 페소.......
한국돈으로 약 1600만원 정도 되는 큰돈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걱정도 되고 너무 미안하기도 해서 구정서씨에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서씨는 한번 구해 봐야죠 하면서....피가 썩이 가족 친지도 아닌데 이렇게 까지 해주는 모습이 제 눈에
천사 같이 보였습니다.
정서씨도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보석서류를 받고도 1달 이란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와서 말하지만 그때 한달이 교도소서 보낸 5년 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보석 서류를 받고 내손에 가지고 있어도 나가지 못하는 그런 심정 누가 알겠습니까?
한지수씨 처럼 여러 분들이 도와 주는것도 아니고 한국에 가족들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당시보석금 마련하는 1달 동안 그 전에 도와 주신 분이랑 골이 깊어졌었습니다.
그 발달은 밥을 못 먹어 힘들어 하는 저에게 외상밥을 먹으라며 본인이 갚아 주겠다고 해서 밥을 먹었는데
그 외상값 좀 값아 달라 하니 한인회를 덜먹이며 싸인이 떨어 져야 한다는 내용에 그런 문제 들은 내가 그냥 힘들어도 참으면
되니 그냥 넘어갈수 었는데
보석금을 위해 모금 운동 을 했는데 정작 보석금서류가 나왔는데 단돈 1페소도 도와 주지 않으니
저는 더이상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피눈물 흘리며 지옥같은 곳에서 이를 악 물며 5년을 이 서류 받을려고
기다렸는데 서류를 받고도 나가지 못하니
저의 마음은 정말 찢어질 정도로 아팠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모금운동 할 당시 귀로 들은 큰돈들만 2천불 ,2천불,천불, 등 만불 이상되었고 손에 쥐어주신돈,바자회,인터넷 모금운동(아고라)
한국통장, 필리핀 통장 등에 많이 된걸로 알고 있고 당시 30만페소를 한인회에 맏겨 놓았다 라고 말했는데
보석서류가 나왔을땐 나는 그런 말한적 없다 보석금 못도와 준다.
라고 완전히 안면 바꾸어 버리니 저는 당연히 화를 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온다는 소식에 메스컴들이 움직인다는 소식이 들리니 전화도 제대로 안받던 그때서야 제가 출감하기
며칠전에 역시 빈손으로 면회와서 5만페소 줄테니 합의 보자 라는 식의 합의금을 가져왔엇으며 저는 그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달라고 한 돈은 보석금을 위해 모금한 돈을 달라고 했지 본인의 돈을 달라고 한적없다 하고 말했고
그돈을 떠밀듯 줄려는걸 결단고 받지 않앗습니다.
이후 구정서씨가 힘들게 60만페소를 마련해 2010년 10월8일 출감하게 되었습니다.
출감하는 중에도 구정서씨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돈 문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변호사 올리브와의 문제 였습니다.
정서씨는 제가 감옥에 있을때 제가 걱정할까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나와서 며칠 지난후에 나오기 위해 힘들었던 점들을
얘기 해 주었습니다.
권사장님께서 선임한 변호사가 협박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변호사랑 말도 몇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정서씨도 변호사 신임이 가지않아 최대한 만나려 하지 안았으나 어쩔수 없이 만나게 될상황 이었나 봅니다.
정서씨 한데 들은 얘기 인데 판사랑 검사는 전혀 변호사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얘기 입니다.
그리고 보석금을 내는 방식에 관해 얘기 하고 싶어 정서씨는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보석금을 내는 방식이 3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보험회사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보헙회사가 보석금을 떠안고 보석금을 할인해주는 방식이 있습니다.
보통 보석금의 18 프로 에서 30 프로 정도 까지 할인해주는 방식인데 필요한 서류는 필리핀에서 세금을 낸 영수증,바랑가이서류,
시청서류 등인데 세금영수증은 전기세,물세,전화세,등 본인 이름으로 나라에 낸 세금 영수증 등입니다.
그래서 정서씨가 보험회사와 6군데를 접촉했는데 전부다 캔슬 되었습니다. 이유는 5년전 일이라 어떠한 서류도 남아 있지
않고 또한 제가 외국인 이기 때문에 보험회사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두번째 는 보석금이 많으니 이를 할인해 달라고 법원에 제출하는 방식입니다.
최대 50프로까지 할인을 받을수 있으며 변호사가 제출하며 서류는 교도소 내에서 뗄수 있습니다.
이는 조금 위험이 있어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서류가 제출되었을경우 법원의 2개 사무실에서 심사를 하는데 다른 한 사무실에서 기각이 되면 허용되지 않으며
기각이 되면 사건에 대해 다른 부서 에서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에 불리 할수 있는 상황이 이루어 질수 있어 서류 다 준비후 취소 했습니다.
이때문에 정서씨가 변호사와 어쩔수 없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는 보석금 모두를 내는 방식입니다.
이는 교도소에서 피의자가 사진등 서류 준비해 법원에 내는 방식입니다.그후 재판서 승소 하게 되면 보석금 모두를
돌려받을수 있습니다.
두번째 내는 방식에 어쩔수 없이 변호사를 정서씨가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변호사랑 만났는데 완전히 싸울 기세 였답니다.
너는 누구냐? 이번 사건이랑 무슨 관계냐? 너는 뭔데 이것 저것 묻느냐?
이렇게 변호사가 화가 단단히 난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 문제 인 것입니다.
변호사를 고용한 권사장님 이 돈 낼때가 되어선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 돈 내지 못하겟다 해버리고
저역시 안에 갇혀 있으니 당연히 돈을 못해니 양쪽서 돈 낼수 없다 하니 중간에선 화가 날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자신은 이용당했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정서씨가 나와서 제 사건에 대해 얘기 하자 하니 정서씨에게 달려들 기세인거죠.
저때문에 정서씨는 오만 수모를 다 당하고 일단 변호사를 달래고 변호사비 역시 정서씨가 안기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나왔습니다. 처음에 정서씨가 하려던 첫번째 보석내는 방식인 보험회사를 이용해 보석금을 내는 방식에
6군데서 퇴짜 맞았다고 하니 변호사 본인이 그거 자기가 할수 있다 면서 32만페소 를 요구 했습니다 . 보험금은 108,000페소 인데
내가 외국인이니 보험 혜택이 안되는 걸 자기가 뒷돈 을 주면 할수 있다면서 32만 페소를 요구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번째 처럼 승소를 하게 되면 돈을 찾을수 있는게 아니라 그냥 없어지는 돈인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씨를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2일후에 결과를 주겠다고 했는데
그사이에 변호사 가 오버를해서 보험회사와 완전히 결정내린것 처럼 말했습니다.
2틀후 정서씨는 그 방법을 택하지 않고 돈 구하는데 힘들더라도 세번째 방법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생각해
세번째 방법을 택하고 그래서 변호사에게 미안해 하며 자신은 세번째 방법을 할거다 하니 변호사는 완전히 노발대발 했다합니다.
제가 생각하도 32만 페소는 보험에 비해 너무 큰돈이었고 그 돈엔 분명히 변호사 본인의 커미션이 들어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씨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조광현 못나오게 만들것이다, 말라카냥에 자기 친구 있는데
거기에 말해서 절대로 못나오게 할것이며 법원에 모든 인맥을 동원해 조광현 못나오게 만들것이다"
나중에 제가 나와서 이런 말들을 해주던데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변호사라는 놈이 변호는 재대로 못해줄 망정 못나오게 만들어
버린다니....
이런 놈이 변호사를 맏았으니 제가 나오지 못하는건 당연했던 것입니다.
제가 출감한 10월8일도 정서씨가 변호사 모르게 모든 서류 준비해서 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루 만에 준비하기 힘든 일인데 7시간인가 8시간인가 밥도 못먹고 싸우나 같은 시청서 꼬박 서류 준비해
4시 30분경 교도소로 오셔서 거기서 나머지 서류 준비하고 서야 전 출감 도장을 손목에 찍을수 있었습니다.
사복을 5년전에 잡혔을 당시 입었던 옷 밖에 없었는데 그 옷이 엄청 어색했습니다.
5년 만에 보는 바깥 풍경에 전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AI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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