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매출 3천만달러 `케이 리 패션' 대표

<※편집자 주 = 최대 재외동포 한인 경제인단체인 월드옥타(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는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아 18일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데 이어 19일부터 나흘간 경남 창원시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제13차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를 연다. 연합뉴스는 이번 행사에 참석하는 한인 무역인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활약상을 보인 인물들을 취재해 소개한다.>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신뢰를 최우선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8일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월드옥타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지식경제부장관상을 수상한 이원주(57) 케이 리 패션 대표는 자신의 회사를 필리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의류 생산업체로 키운 비결을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경남 고성 출신인 이씨는 1976년 군 제대 직후 지인 소개로 부산의 국제그룹 산하 조광무역 와이셔츠 공장에 입사하면서 의류업계에 발을 들였다.

기계공 말단직으로 입사한 이씨는 `이왕에 시작한 일,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보자'는 심정으로 와이셔츠 원단을 재단해 바느질하고, 포장을 해서 실어 보내는 전 과정을 부서별로 찾아다니며 묻고 어깨너머로 배웠다.

왕성한 호기심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받은 그는 1980년 필리핀 마닐라 공장에 1년간 파견되는 기회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83년 미국 의류회사로부터 필리핀 공장의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다시 필리핀 땅을 밟았다.

이씨는 "미국 본사는 나를 필리핀에만 두지 않았다"며 "미국, 홍콩, 남미의 국가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지 열흘 뒤에야 소식을 들을 정도로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3년 반이 지나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인 파트너와 둘이 소자본으로 여성의류 하청공장을 차렸다.

이씨는 `주문하면 품질과 납기는 무조건 지킨다'는 원칙 덕택인지 1년여 만에 직원이 300명까지 늘자 파트너와 분리, 1987년 자본금 25만 달러를 투입해 `케이 리 패션(Kay Lee Fashion)'을 설립했다.

코리아(Korea)의 첫 글자 `K'를 변형한 회사 이름은 `코리아에서 온 이씨가 세운 패션업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업 초장기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신용장을 여느라 일주일 동안 은행을 드나들며 사정을 해야했고, 납기를 맞추려고 열흘간 밤샘작업을 하고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노조원들의 불법파업으로 폐업신고를 하고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케이 리 패션을 열고 처음에는 미국ㆍ유럽회사의 하청업체로부터 재하청만 받다가 1989년 직접 주문을 받기 시작해 200명이었던 직원은 2천500명까지 불어났고, 2006년∼2008년 연간매출 4천만 달러를 달성했다.

그의 회사는 주로 바나나리퍼블릭과 폴로, 캘빈클라인 같은 유명의류를 필리핀 공장에서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는데, 2009년부터 미국 금융위기 여파로 주문이 줄었지만 여전히 3천만달러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씨는 "사업을 하면서 거짓말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거짓말과 변명은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할 수는 있어도 잘못은 또 다른 잘못을 낳기에 결국 발목을 잡는다"고 비즈니스 철학을 밝혔다.

그는 2003년부터 사단법인 JTS코리아(이사장 법륜스님) 필리핀지부 대표로서 10여명의 봉사자들과 함께 민다나오 오지에 40여개 학교 설립을 지원해왔으며 올해 1월부터는 필리핀한인총연합회 회장을 맡아 필리핀 동포 10만명을 대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