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미 공군에 입대를 하겠다고 제 앞에 와 상담을 해왔답니다.
엄마에게 말하면 놀라 듣기도 전에 반대를 할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에 
한국 군대를 다녀온 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들이 제게 먼저 다가와 군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지요.
 
막상 남의 자식이라면 쉽게 그래 남자가 되는 길에 군대만큼 좋은 것이 없다하고
그냥 군에 밀어 버릴텐데 내 자신도 아니고, 부모 자신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자식의 문제라 그런지
선득 마음에서 허락이 되지 않았답니다.
 
결국 아들의 설득에 엄마도 넘어가고, 저 같은 경우 50대 50의 마음이라 아들 놈이 좀더 인내심도 키우고,
세상 우물안 개구리 처럼 지내기 보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 경험도 쌓고,
어릴적부터 마음을 꺽는 훈련을 받지 못하면 방자한 놈으로 자랄것 같아
상사의 명령에도 복종하고, 순종하는 그런 낮은 마음을 얻게 하고 싶어 허락을 해주었지요.
 
시간이 지나 미 공군 훈련소에서 졸업을 한단고 초청장이 오더군요.
아내와 함께 텍사스 모부대에 졸업식장을 갔는데 얼마나 추운지 장갑을 그날 끼워도
더운 날씨속에 살던 우리 부부는 무척 추워 고통스러운 졸업식장이었답니다.
 
전부 아들 같은 젊은이들이 줄을 맞추어 연병장에서 졸업식을 거행하는데
수많은 백인들 속에 몇 아니 되는 동양인속에서 아들의 얼굴을 찾느라
우리 부부는 눈을 쏙배고 이리 저리 살피며 아들 찾아 헤메고 있었답니다.
 
이렇게 저렇게 아들을 만나 군에서 외박을 허락하여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으니 우리 같으면 불고기, 갈비, 등등 한국 음식을 찾을텐데
제일 먼저 먹고 싶은 것이 그 흔한 팬케익을 사달라 하더군요.
 
속으로 이 놈이 한국놈이 아니고 미국놈이구나 하는 은근히 섭섭한 마음도 들면서
IHOP이란 근처 레스토랑에 들려 팬케익을 사주었답니다.
 
얼마나 캔케익을 먹던지 옆에서 보는 이들도 함께 웃으며 놀랐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훈련소 식당에서 나오는 팬케익이 너무나 양이 작고
때론 조교의 포악함으로 먹지도 못하고 버려진 팬케익이 가슴에 남아서
밖에 나가면 제일 원수 갚듯이 먹어 버리겠다는 것이 고작 팬케익이었지요.
 
빡빡 머리의 아들을 뒤로 한체 다음날 다시 부대를 보내고
시간은 훌쩍 지나 Florida의 모 공군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답니다.
 
항상 밝고 친구들과 사이가 좋고, 어릴적부터 많은 호신술로 어디가서 매를 맞아본 적이 없는 놈이기에
제 마음 한구석엔 어디가도 살겠다 하는 안도함으로 지냈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만난 여자 친구로 부터 아들이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울면서 받게 되었답니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지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소식에 전화로 울며 대화를 나누는 아들 여자친구를 진정시키고
자초지정을 물었지만 너무나 놀란 상태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수가 없었답니다.
 
아내와 저는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단지 기도하며 모든 일을 전능자에게
넘기는 일외에는 할것이 없었답니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정상으로 금방 회복이 되었지만
그 일과함께 몇개월 후 전쟁터에서 귀도 다쳐 의가사 제대를 군에서 밀어 부쳐
군에서 3년이 다 차지 않은 상태로 명예 제대를 하게되었지요. 
 
아들이 돌아 온 후에야 왜 그런 일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는지 듣고 나서야
외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나의 결정 같아서 몹시도 아픈 시간을 서로 나누게 되었지요.
 
이유는 내가 생각한 한국군대 같은 군 생활이 아니었답니다.
전쟁상황인 것을 저는 전혀 몰랐고, 제 아들이 특수부대에 전출된 것 또한 극비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가 잠을 자는 동안 이 놈은 여러 나라를 돌아 다니면 치열한 전쟁을 하면서도 전화가 오면
그냥 웃으면서 잘 있고 재미난 이야기만 해주니 그런 줄알고 우리 부부는 살았던 것이지요.
엄마 , 아빠가 걱정 할까봐 전쟁터에 살면서도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6개월 동안 친한 동료 친구들이 연속적으로 죽어가 6개월 후에는 같이 근무한 친한 동료들이 9명 모두 죽고
둘만 살아 남았는데 그 살아 남은 선임 친구 흑인 친구 조차도 바로 제대한 후에 집에서 총으로 자살을
한 소식을 듣고 그 다음 죽을 차례는 자신 같아 많이도 죽음에 시달려 깊은 우울증에 방치된체
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 답니다.
 
한 차례도 아니고 연속해서 친구들 장례식장을 오가며 아들의 마음의 우울증은 극심하게 심해졌지만 수시로 떠나야 하는 극박한 전쟁 상황에 그런 아들은 그냥 방치된체 이리 저리 쓸려 다녔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부대에 알던 친구들이 다 떠난 자리에 새로운 놈들이 채워지면서 친하게 지내던 죽은 선임 상사의 자리에 백인 우월 사상을 가진 상사가 동양인이 제 아들을 너무나 인종 차별을 가하기 시작하여
근무를 하고 돌아 오면 방안에 쌀이 가득 부어져 있고 워커속에도 이불속애도 쌀도 쓰레기도 날마다 방에
근무를 다녀오면 그렇게 만들어 놓곤했답니다.
쫄병 놈들도 조차 선임 백인 우월주의 상사를 믿고 아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몇대 갈기면  그 일로 리포트 작성하여 경고를 먹기도하고 그런 밤이면 그 백인 상사에게 불려가 무지도 많이 맞게되어,
한마디의 말도 그 후로 부대원들과 섞지 않은체 혼자의 세계속에 살게되니 우울증이 급속히 악화되었지요.
 
단체적으로 동양인인 제 아들 하나를 쫄병부터 상사까지 돌아가면서 누가 한짓인지 모르게 린치를 가하듯
다양한 방법으로 정신적으로 차별을 하기에 친구들이 떠난 자리와 그런 인종 차별에 괴롭힘과 또한 겹친 깊은 우울증이 더하여 그만 한 순간 약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 털어 놓았다고 이야기 하더군요.
 
집에 돌아온 아들은 전의 제 아들이 아니었답니다.
너무나 폭력적이고 반항적으로 변하여 있었답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여 정말 누가 말 잘못하면 죽일것 같은 눈매를 가지고 잇더군요.
그래서 부대에서 내보냈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나중에 물어 보니 조금 더 있었다면 아마도 부대원 전원 다 죽였을것이라 말하더군요.
휴~ 아찔한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답니다.
 
어느날은 갑자기 집안의 온 창문을 다 부수며 뛰쳐나가서 손에는 피가 줄줄 흐르면서 밤에 뛰쳐나가서
정말 아들 하나 이렇게 잃게되는가 하고 깊은 신음에 저희 부부는 정말 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던 날도 있었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부모의 사랑속에서 마음이 회복되어 갔지만
밤새 죽은 친구들이 나타나 아들을 보고 같이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는
그런 귀신 소동에 또 한바탕 일년여 동안을 온 식구가 시달리며 또 길이 없어서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었답니다.
 
이제 3년이 지난 이야기이고 그 기간 동안 아들도 저도 많이 모든 면에 성숙해질수 밖에 없도록
마음이 비워지고, 자아가 무너지는 그런 세월을 보내게 되었지요.
 
지금은 그래도 군에서 제공해준 여러 장학금 덕분에 전액 학비와 생활비까지 받으며
다큐 영화 감독이 되겠다고 부모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공부중인 아들을 보면서 대견한 생각도 들고
지나온 세월이 아픈 기억에서 귀한 추억으로 바뀌어 갑니다.
 
전보다 더 성숙해진 아들이 되었기에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지만
너무 큰 홍역속에 살게 한 것 같아 아비로써 마음이 무척 아팠답니다.
너무나 일찍 어른이 된듯한 아들을 보지만 그래도 아내와 저는 여린 아들로만 보여져서 필리핀 은퇴를 떠나고자 여러번 계획을 실행하려 하다가도 이런 아들을 생각할때 아내의 이런 우려의 얼굴로 마음이 행복해 하지 않다면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이 낫다 생각이 들어 은퇴를 미루고 있는 실정이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마음속 고난의 이야기를 필고에 나누면
아마도 다양한 아름다운 기억의 이야기가 쏟아쟈 나올것입니다.
삶속에 나만 고난속에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용기를 내지 않을까 생각해서 부끄러운 가족사이지만 이렇게 분위기 차원겸 적어 보았답니다.
 
좋은 하루되시구요.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여 인내를 만들어 주고 또 소망을 얻게 하는 도구이기에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니 두려워 하기보다 그 고난을 지혜롭게 잘 이겨내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