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좋은 연봉에 전공분야 회사를 추천받아서 회사의 실적과 매출 그리고 잠재력을 최대한 살펴보고 옮긴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완전히 깡통 회사더군요. 11개월째 생산도 없고 적자만 내는 회사인데다가 입사하자마자 천안에서 대전으로 회사를 옮긴다고 하더군요.
  집은 분당 근처고 회사가 천안이라 출퇴근이 가능하겠다 싶어 하니웰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옮겼는데 완전히 사기 당한 기분이 들더군요. 
 
  대전으로는 못가겠다 하니 왜 입사했냐고 하더군요. 입사전에 대전으로 옮긴다는 말은 들은적도 없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했더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명색이 품질부서장인데 너무 쉽게 나가라고 하길래 무작정 그만두었습니다.
  그만두고 나니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더군요. 낼모레면 40인데 미혼으로 지내다가 처음으로 괜찮은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도 목전에 둔 상태에서 결국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각설하고 10년간 한번도 휴가를 못갔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서 무작정 필리핀 가는 표를 샀습니다. 출발 이틀전에 비행기표 사고 출발 하루전에 퀘손에 있는 저렴한 호텔 2일 예약하고 나머지 4일은 어떻게 되겠지 하고 테니스 가방하나에 라켓 4자루, 옷가지, 책 몇권 싸들고 부모님께는 머리 식힌다는 말씀만 드리고 마닐라에 도착하니 참 습하고 덥더군요.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혼자 택시타고 마닐라베이가서 랍스터 먹었습니다. 40평생 아니 39년동안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랍스터 배불리 먹고 이곳에서 정보를 얻은 테니스장에 가봤습니다. 올티가스 메랄코에 갔는데 한국과 참 많이 달랐습니다. 택시기사보고 다시 퀘손으로 가자 하니 제가 있는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아모란또 스테이디엄 테니스장이 있다더군요. 
 
  다음날 아모란또에 무작정 가서 테니스 칠 수 있냐 했더니 테니스 클럽 멤버들이 모두 잘 대해주더군요. 그곳에는 필리핀 사람들외에는 한국 사람은 저 밖에 없었죠.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테니스라는 교차점이 있다보니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필리핀 오기전에 필리핀 사람들 조심하라는 말 많이 들었는데 그 친구들은 제게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대해주더군요. 아침에 호텔에 자기 차로 저를 데리러 오고 저녁이면 집에 저녁식사 초대하고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저렴한 가격이지만 더 좋은 호텔도 소개해주더니 자기 차로 그 호텔까지 가서 가격 흥정까지 해주더군요. 퀘손 애비뉴에 있는 애버딘 호텔에서 3500페소 주고 이틀을 보냈습니다.
 
  필리핀 친구들과 테니스 치다가 띠목 서클에 있는 바베큐집에서 저녁도 먹고 꾸바오에 있는 라나이라는 스트립바도 가보고 오로라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도 하고 필리핀 아가씨들과 노래방 기계로 노래도 부르고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LA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버몬 불리바드에서 한인 타운이 있는 올림픽 불리바드까지 17마일을 걸어서 갔는데 한인 타운에 있는 한국 교포들이 그러더군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92년 LA 흑인 폭동시 흑인의 폭동이 시작되어 한인타운까지 흑인들이 불지르면서 걸어온 그 길이었다는군요. 흑인 슬럼을 그대로 걸어갔던 거죠. 
 
   이번 마닐라 여행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혼자서 무작정 이곳 저곳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길을 잃으면 모르면 필리핀 친구들에게 전화걸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면서 지명도 잘 모르는 위험한 곳을 많이 걸어다녔던 모양입니다. 필리핀 친구들이 걱정하더군요. 제발 택시 좀 이용하라고.
 
   새벽 3시에 퀘손 애비뉴에서 발롯을 파는 행상과 딤섬을 나눠먹으면서 띠목에 있는 KTV를 아느냐 했더니 잘 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둘이서 써 윌리엄스 호텔 띠목 서클을 거쳐, 임페리얼 팰리스호텔, 홍콩, 미스코리아까지 걸어갔습니다. 가족은 어떻게 되냐, 자식은 몇이냐, 얼마나 버냐, 걷다보면 위험하지 않냐, 등등 발롯이나 담배를 주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팔아주기도 하고 걷다가 힘들면 쉬고 미네랄 워터 사서 서로 나눠 먹어가면서 1시간을 걷다보니 이 또한 색다른 여행이더군요. 
  새벽 4시가 넘어서 띠목에서 발롯 행상과 헤어지고 애버딘 호텔로 돌아왔더니 호텔 가드가 반겨주네요. 다음에 또 오면 자기가 딤섬 사겠다더군요. 
 
   미국에서 공부할때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결국은 사람들 사는 곳이더군요. 필리핀 사람들도 이방인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테니스장에서 첫째 둘째날은 저도 약간은 삐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음을 열고 제가 가진 능력하에서 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주었더니 그들도 마음을 열었습니다. 테니스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사실 필리핀에서 돈 좀 있는 사람들입니다. 햄버거 가게 체인과 마사지 샵 체인을 가진 중국 화교도 있고 중고차 딜러, 마닐라에만 집이 10채가 넘는 부동산 업자도 있고요. 한국 역사와 문화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친구들도 있더군요. 
 
   이제 한국에 돌아온지 일주일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다시 필리핀에 돌아가고 싶네요. 다음주에는 필리핀에도 공장이 있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갑니다. 사실 첫 직장이었는데 지금 놀고 있다고 하니 돌아오라는군요.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필리핀 주재원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얼른 가겠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15년 후에 은퇴할 텐데 그때는 필리핀으로 가려고 합니다. 정말 후덥지근하고 마치 70년대 후반 또는 8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모습이 느껴지는 그곳이 왜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