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가운데 300만원 받아‥"골탕먹이려고 납치"

(대전=연합뉴스) 김준호 김수진 기자 = 천안지역 체육회 회원들이 필리핀에서 한때 납치됐다가 몸값을 내고 풀려난 사건의 배후에는 이들과 동행했던 여행 가이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충남경찰청 외사계는 회원들을 현지에서 안내했던 한국인 가이드 최모(33)씨를 긴급체포했다고 17일 밝혔다.

 

납치된 회원들에 의해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던 최씨는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현지 필리핀경찰 및 한국인 브로커 '톰'과 공모한 사실을 인정했다.

최씨는 경찰에서 "여행객들이 현지 여성들에게 너무 비신사적으로 굴어 골탕을 먹이려다가 뜻하지 않게 일이 커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드러나는 범행 전모‥"부적절한 모습에 앙심"

일정한 직업 없이 프리랜서로 필리핀 관광 가이드를 하고 있는 최씨는 지난 11일 천안 성환체육회 회원 12명을 데리고 필리핀 마닐라로 들어갔다.

과거에 필리핀 여행을 갔다 온 경험이 있던 회원들은 여행업체의 여행상품 대신 프리랜서 가이드를 앞세워 자유여행 형식을 취했다.

가이드 최씨는 이번 여행을 함께한 A씨가 추천한 인물로 A씨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다.


최씨는 "회원들이 13일 낮 마닐라 인근에서 휴양하는 등 시간을 보낸 뒤 저녁에는 현지 여성들과 술집에서 유흥을 즐겼다"며 "이 과정에서 일부 회원들이 비신사적인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모든 관광 일정을 계획한 가이드 최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술집 주인 이모씨에게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명문대 법대를 나온 최씨는 여행객들을 안내하면서 일년에 20여 차례 필리핀을 드나들었고, 이 과정에서 이씨의 술집을 단골로 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최씨에게 "마닐라에 50대의 한국인 '톰'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라"며 주선을 하게 된다.

이날 밤늦게 회원들과 함께 마닐라 다이아몬드 호텔로 돌아온 최씨는 '톰'과 수차례 전화 통화를 하고, 14일 새벽 호텔에서 만나 범행을 모의하게 된다.

경찰은 "톰은 최씨에게 '내일 오전 호텔 인근에 두대의 차량과 경찰을 대기시켜 놓을테니 마리화나 주머니를 떨어뜨리라'고 지시했다"면서 "일행들에게 쇼핑을 가자고 해서 밖으로 데려오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마약사범으로 몰아세우고 금품 요구

최씨는 현지시각으로 지난 14일 오전 10시께 필리핀 마닐라 말라테 다이아몬드 호텔에서 쇼핑을 빙자해 김모(50)씨 등 4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회원들은 경찰에서 "가이드가 '출국 시간이 두시간 가량 남았다'며 쇼핑할 사람은 말하라고 해 일행 가운데 4명이 가이드를 따라나섰다가 납치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오후 2시 인천공항해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낮 12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공범인 필리핀 현지 경찰관 5명은 '마라화나를 흡연한 혐의로 체포한다'면서 이들을 총으로 위협, 대기 중인 승합차 2대에 나눠 태웠다.

마리화나 주머니는 최씨가 몰래 흘렸다.

범인들은 한 경찰서의 밀실에 이들을 수갑을 채운 채 감금했다.

이때 '톰'이 나타나 통역 역할을 한다면서 김씨 등에게 석방 대가로 각 600만원씩 모두 2천400만원을 요구했다.

경찰은 "톰이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마리화나 소지로 붙잡히면 수년을 감옥에서 살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해결해야 한다. 나 아니면 못나간다'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그는 피해자 중 1명과 함께 나머지 일행들이 기다리는 호텔로 돌아와 피해자들을 풀려나게 하려면 3천만원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 다시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사건 당일 오후 3시40분께 필리핀 마닐라 마비니 스트리트에 위치한 환전상에 톰과 함께 방문, A씨 명의의 환치기계좌에 피랍된 4명의 가족들이 모두 2천400만원을 입금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 모습은 현지 CC(폐쇄회로)TV에 고스란히 찍혔다.

당시 최씨는 납치된 일행들 앞에서 톰에게 '형님'이라는 단어를 사용, 회원들로부터 공범으로 의심받게 된다고 경찰은 전했다.

최씨는 이 돈을 톰과 함께 87만6천페소로 환전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현지 경찰들은 김씨 등 4명을 납치 7시간여만인 오후 5시30분께 석방했다.

회원들이 석방된 후 최씨는 필리핀 경찰관들과 환전한 금액을 각각 배분했다.

◇"경찰서에서 1~2일 재우려했을 뿐"

최씨는 이날 오전 조사를 받으려고 충남지방경찰청 외사계에 소환되는 과정에서 "체육회 회원들이 현지에서 비신사적으로 행동했다"며 "그런 모습에 화가 나 골탕을 먹이려고 이들을 잠시 감금할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너무 화가 날 정도로 현지 여성들을 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경찰서에서 1~2일 정도만 재울 생각이었다"면서 "경찰이 개입되거나 몸값을 요구하는 줄 몰랐는데 일이 너무 커졌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몸값 가운데 300만원을 나눠 받았다"면서도 "주점 업주 이씨가 돈을 가지고 들어가면 의심받는다고 해서 귀국할 때 돈을 놓고 나왔다"고 주장했다.

또 "이씨가 '당신이 안들어가면 용의자 된다'고 해서 여동생으로부터 80만원을 송금받아 비행기를 타고 들어왔다"면서 "이씨가 '이쪽은 아무 일 없을 테니 모른다는 말로 일관하라'고 알려줬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여행에 동행했던 한 체육회 회원은 "술은 마셨지만 누가 비신사적인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경찰, 현지 한국인 인적사항 파악‥국제 수사 공조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현지 필리핀 경찰 및 한국인 브로커 '톰'과 공모한 사실을 인정한 최씨를 인질강도 혐의로 긴급체포한 상태다.

이 사건과 관련된 필리핀 경찰 10명도 납치강도 현지에서 검거됐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조사 과정에서 최씨가 납치를 공모한 사실을 자백하는 등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했다"며 "보강수사를 마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필리핀 현지에 있는 공범 톰과 이씨의 인적사항을 특정한 뒤 인터폴 수배 등 국제공조수사를 요청할 계획이다.

이 관계자는 "이씨는 수십년전 필리핀으로 출국했고, 현지에서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만간 현지에 수사관을 파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수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이번에 여행을 나갔던 체육회 회원들을 상대로 필리핀 현지에서 위법 행위를 벌였는지 여부 등에 대한 조사도 벌인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