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 6 -
"뺑이는 쳐도 법무부 시계는 돌아간다!"란 말이 있다.
3년... 아니, 정확히 2년 10개월 열흘만에 난 그 지옥같았던 인천 교도소를 나올 수 있었다.50일의 가석방을 먹고... 당시 3년형기를 받는 죄명 중엔 강도죄가 6개월정도의 가석방을, 절도죄가 8개월정도...그리고 상해치사 죄명이 10개월 정도의 가석방을 받을 수 있는 관행이 있었는데...난 그중에서도 제일 나은 죄명을 달고도 미결수때의 징벌과 기결수로 넘어가서도 또 한번의 사고를 쳐서 징벌을 받는 바람에 같은 죄명의 다른 재소자들 보다 8개월여나 늦게서야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3년...세상도, 현실도, 춥고 배고팠던 내 주변 선후배와 친구들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시엔 가석방자들을 교도소 정문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고 주안역앞까지 교도소 호송버스로 태워다 주곤 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와 나를 둘러쌌다. 두부를 들이미는 녀석, 계란판을 바닥에 깔더니 밟고 지나가라는 녀석,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녀석, 녀석들...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았다. "카악~"가래침을 한번 뱉고나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다르다..." 다른 하늘이었다. '같은 인천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인데 담장 안과 밖의 하늘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을까?...'
역시 자유란 좋은 것이었다!!!
동네로 돌아오자마자 친구들은 나를 데리고 스텐드빠니 룸싸롱이니 업소들을 순례하며 업주들을 소개시키며 그들에게 나를 인지 시켰고, 그들중에는 내가 십대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들도 더러 있었다.
내가 없는 3년 동안 친구들과 후배들은 여러번의 전쟁을 더 치뤘었고 거기서 얻은 전리품은 구로동 텍사스촌으로의 유혈입성이었다.
당시의 구로동...빈민촌이긴 했지만 삶의 애환이 배인 곳이다. 구종점이라고 부르는 언덕배기에서 부터 지금의 대림 전철역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으로 스텐드빠에 룸카페, 찻집등의 3종 업소들이 이백여 곳 늘어서 있고, 어둠이 내릴 무렵부터 새벽 동이 터오는 시간까지 가면을 쓴듯 진한 화장과 싸구려 향수로 치장한 어린 호스테스들이 길가로 나와 호객행위를 했다.
지옥같은 3년간의 형기뒤에 내게 주어진 보상은 업소 세곳의 타이틀과 양복,구두... 그리고 턱도없는 만용...태풍의 눈인양 고요속에 또아리를 틀고있는 또 한차례의 지독한 전쟁이었다.
꿀맛같은 사회에서의 휴식도 잠시 구로동 텍사스촌을 놓고 전라도 나주영산포 식구들과 전쟁이 붙었다. 정말 길고도 지루한 전쟁이었다. 무려 4개월여를 지진부진 끌어가던 그 전쟁은 후배 한명이 온몸에 수십여 곳의 칼을 맞고 사망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건달로서의 밥줄인 텍사스는 지켰고, 명예(?)와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지만 죽은 녀석은 내가 가장 아끼던 2년 밑의 의형제 아우였다.
녀석은 죽기전까지 동네의 술집에서 일하던 아가씨 하나와 동거를 했었는데... 녀석이 죽고난 뒤에도 그녀는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녀석의 체취가 배인 동네를 떠나선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술에 취해 펑펑 울면서...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각별히 당부를 해두었다. 어느 누구라도 그녀를 힘들게 하지말라고...
"개창일" 본명은 김창일이라는 2년위의 선배인데 술만 마시면 개가 된다고해서 개창일이라 부르는 선배가 있었다. 온몸을 문신과 칼자국으로 도배를 했고, 싸움만 붙었다하면 일단 팬티 하나 걸치지않고 홀딱 벗어제친다. 어지간한 상대들은 몸을 뒤덮은 문신과 칼자욱에 일단 기가 질린다. 그리곤 또다시 그 몸을 깨진 병이나 칼로 그어대면서 꼬장을 죽여대면 거의 싸움을 포기하고 만다.
근데...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이냥반의 싸움 실력은 젬병이다. 물건 역시 번데기 수준이고...ㅎㅎ
이 양반이 죽은 아우녀석의 여자를 겁탈하는 사건이 생겼다. 녀석이 죽은 지 한달도 채 못됐을 무렵이었다. 다들 분개했지만 선배라는 명분과 평소 개스타일인 그를 알기에 쉬쉬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나설 수 밖엔 없었다. 내 동생이기에...더구나 죽은 녀석이기에 난 나서야만 했다.
깡소주를 두 병 까고 업소 주방에 대기상태로 숨겨둔 연장을 꺼내 잠바 속으로 갈무리 하고 만류하는 친구들과 후배들을 뿌리친채 가게 문을 나섰다.
삼십여분의 수배끝에 동네의 한 룸싸롱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난 주저없이 들어가 작업을 해버렸다. 복부에 두 방 칼침을 주고 돌아서는데...꽥꽥 거리면서 질러대는 그의 비명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천천히 돌아선 난 부들부들 떨고있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외면한 채 한쪽 발목의 아킬레스건까지 잘라 버렸다.
가리봉동과 구로동 일대는 물론이고 서로 협조가 가능한 한수 이남쪽으론 모조리 비상이 걸렸다. 날 잡아 들이라는 수배가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살긴 했지만...어떤 명분앞에서도 이른바 선배를 하극상 했다는 자체가 날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로 2년 가까이 난 동네를 들어갈수도...친구나 후배들을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 부평초처럼 떠돌면서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기에...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나도 널 잡아야만 한다..."며 울먹이기만 했다.
스물 둘... 여전히 힘과 나이가 부족한 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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