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흔히들 말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세번의 기회를 만난다"고... 내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을까... 분명히 있었다. 부귀와 명성으로 갈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을지언정... 내 삶의 전환점을 좀더 빨리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단언컨데 건달로서의 내 삶이란 분명 내것이 아니었었다.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정치가나 건달이란 그 기질을 타고 나는 것" 이라고... 분명 난 그런 기질을 갖고 태어나지도 못했고, 그때까지도...그리고 그후로도 수년의 세월을 더, 난 내것이 아닌 옷을 어색하게 걸친채 살았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도 남을 기회를 가져다줄만큼의...내겐 너무도 커다란 운명적인 한 여인과의 인연... 지금 내 아내와의 만남 이었다.

 

이x룡을 바닥에서 내쳐버리고 실질적인 바닥의 골목대장으로 올라선 나는 사무실을 하나 내고 바닥내 업주들을 중심으로 상조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상조회의 간사직을 맡게된다. 상조회에 가입한 업주들로 부터 매달 30만원씩이 운영비 명목으로 들어왔고, 가입된 업소들은 꼼꼼한 관리를 받도록 해 주었다. 종업원 아가씨나 웨이터등을 로테이션으로 물갈이 해준다거나, 업소에 진상 또는 영업방해식의 사고가 생겼을 경우 신속히 처리를 해준다던가 하는 식의 관리 였다. 

 

밑의 아이들에게도 철저히 주지를 시켰다. 바닥에서 업주들에게 개인적으로 슈킹을 들이댄다던가, 외상 술을 마신다던가 하는 넘들은 무조건 양아치로 간주하고 용서치 않겠다는... 바닥은 한동안 조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나 였다. 단시간내의 승승장구로 간은 이미 배밖으로 나와 있었다. 당시 차를 석대나 뽑아서 번갈아 몰고 다니는가 하면 걸치고 있는 옷가지에 장신구들까지도 수입 브랜드가 아니면 만족치 못했고, 서울 변두리의 몇곳 영업장에서 번돈으로 강남쪽 룸싸롱이니 요정이니를 드나들며 하룻밤에 기백씩을 쏟아붓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신촌의 "캔디랜드"란 나이트클럽의 업사장이란 타이틀로만 맡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2,3일씩 들러 돌아보곤 했었다. 여기서 난 지금의 내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근처 홍익대 미대 2학년이던 아내는 워낙 완고하고 교육열에 불타던(?) 열혈 장모님의 장녀로 태어난 덕분에 초등학교 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와 집으로 밖엔 모르던 범생이 학생, 착한 딸이었다. 대학 1학년때 그런 어머니의 구속이 너무나도 싫어 친구들과 일본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가 육개월만에 거기까지 찾아간 장모님에게 붙잡혀 돌아온 전적도 있는 꼴통 기질도 겸비하긴 했지만...ㅎㅎ

 

코에 피어싱을 하고 산뜻하지만 결코 가벼워보이지 않는 옷차림에 가볍게 몸을 흔들며 플로링을 누비는 그녀의 청순함에 난 처음 보자마자 반했던 것 같다. 그녀들 테이블 담당의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단골들이고 그녀도 가끔 동행하곤 한단다. 웨이터를 시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없는 고전적인 방법이라 몸에 닭살이 돋지만...ㅎㅎ

 

웨이터의 가리킴에 고개를 돌려 잠깐 내쪽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도도함이란...난 지금도 그때 그녀의 그 시선을 생각하면 번갯불을 맞은 듯 화들짝 놀라 지금의 아내와 그때를 비교하기도 한다. 극성스런 그녀 친구들의 제의에 그 자리에 앉게됐고 우린 그렇게 시작됐다. 일어서는 자리에서 난 당당히 그녀에게만 명함을 건네면서 에프터를 신청했고 그녀 친구들의 환호와 야유속에서 그녀도 나를 받아들였다. 우린 서로가 너무도 모르는 길에서 살아왔기에 더더욱 서로에게 쉽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분명하게 기억한다. 아내와 처음 만난지 열흘째, 우린 첫관계를 가졌고, 한달 보름째 되던 날 우린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곤 학교를 휴학했다. 아내는 늘 자라온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었기에 우린 더더욱 빠르게 합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책없을 나이에 시작된 대책없는 동거생활... 그러나 너무나 행복했고 포근했다. 난 어려서부터 늘 내 맘속에 갈무리된 꿈중의 하나가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이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내 길이 아닌 길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길에서 살아남고자 악귀처럼 살았을뿐...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란걸 안다. 다만 그땐 그게 내 길이 아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뿐...

 

이장의 서두에 건달은 타고나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난 절대로 건달로서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지도 못했고, 영화에서 처럼 붕붕 날라다니면서 서너명은 우습게 놓고 칠수 있는 그런 개인기를 겸비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그런 개인기란 쇠파이프에 회칼이 본격적으로 난무하는 칠,팔십년대 이후론 필요 옵션이 아닌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고... 중요한 건 기질이다. 그리고 선택이다. 최악의 경우 앞에서 어떤 선택이 필요할때 과감히 내 이기를 버릴 수 있는... 

 

어느 날 사우나에 갔다가 전신 거울앞에 섰다. 건달로서의 아무런 개성도 보이질 않았다 내 모양새가... 덩치가 우람하지도, 얼굴이 사납게 생기지도, 그렇다고 목앞에 칼이 들어와도 의연하게 버틸수 있는 기질도... 문신을 하기로 했다. 내 이름 석자를 대면 문신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크고 화려하게... 하루 세시간씩...보름여가 걸려서야 작업은 끝났다. 

아내는 첫날 밤, 그런 내 몸을 보고도 전혀 혐오스러워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난 지금까지도 그런 아내를 많이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와 동거를 하면서도 난 한동안은 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가 생겼다. 2년 3년 밑의 녀석들이 동네의 한 원로양반을 친 것이다. 동네에서 업소를 경영하면서 타지역 아이를 타이틀로 데려온게 녀석들에겐 불만이었던 것 같다.

난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사고는 났고, 부랴부랴 병실로 찾아간 내게 원로는 맞고 있던 링겔병을 빼서 집어던졌다. 내가 시킨줄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오해시라고 몇번을 얘기해도 도무지 말이 먹히지 않길래 돌아서면서 동생들에게 한마디 던진 게 화근이 되버렸다.

 

"야이 병신새끼들아! 발목 부러뜨리면서 손모가지는 왜 그냥뒀어?" 뒤에서 이를 갈며 소리치는 그 양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야, 이 장현이! 너 내가 완전히 한물 간 폐품인줄 알지? 이새꺄 두고보자. 널 내가 어떻게 죽이는지..." 남은 건 신속하고 깔끔한 뒷처리 뿐이었다. 사건의 주동자 녀석들을 대구쪽 식구들에게 부탁해 피신을 시키고, 더 밑의 꼬맹이들은 광명시 식구들에게 부탁해 그쪽 업소에 집어 넣었다. 지리상으론 가리봉동과 광명시가 다리 하나 건너 맛닿은 곳이지만 엄연히 관할은 서울 남부 경찰서와 광명시라면 경기도경에 해당하기에 일단 광명시로라도 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중재를 부탁했다. 폭력건만 합의를 보고 고소취하를 하게되면 범단(범죄단체)건은 당연히 무마 되리라는 생각으로...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았다. 린치를 당한 원로는 때린 놈들보다도 내가 더 괘씸하다는 것이었고, 난 굳이 한물 간 퇴물의 노망이라고 치부해버렸기에 합의는 지진부진 늦어졌고, 그 사이 그는 비밀리에 나까지 범단 작업을 해서 고소를 해버린 것이다.

 

평소 호형호제 하던 남부 강력계 형사가 휴대폰으로 어떻게 된거냐며 연락을 해와서야 알게됐다. 상황은 빼도박도 못하게끔 멋지게 작업이 되어 있었다. 평소 상조회에 가입했던 업주들에게 슈킹조로 매달 상납을 강요 당했다는 진술조서를 받아냈고, 평소 들르던 룸이나 나이트에서 오버된 술값을 사인지 몇장 긁어준것까지 슈킹으로 엮여 있었다.

 

 빌어먹을...그놈의 지긋지긋한 도피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전과가 없는 후배넘의 신분증에 내 사진을 붙여(당시 신분증은 변조가 용이했기에) 운전면허를 접수하고 그렇게 취득한 면허증으로 당분간은 도피생활에 활용할 수 있었지만...

난 결국 믿었던 후배넘 하나의 배신으로 크리스마스를 몇일 앞둔 어느날, 은거해있던 숙소 앞에서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잡혔다.

 

겨울바다를 보러 가자던 아내와의 약속은 지킬 수가 없었다. 

 

첫아이 임신 삼개월에 접어드는 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