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

 

징 역 2년에 보호감호 7년... 최종적으로 내게 주어진 형기 였다.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다. 적어도 당시의 난 그랬던 것 같다. 듣기 좋은 표현으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도 한다지??? 처음엔 정말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희망도 보이질 않더니, 그놈의 현실에 어느사이엔가 난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는 걸 알게됐다. 그러기엔 아내의 힘과 용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래서 난 신앙인은 아니지만 지금의 내 아내를 만나게 해준 신께 늘 감사를 드린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날 향한 꿋꿋한 위로가 없었다면 난 벌써 재판이 진행되던 그 시기에 나 자신을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청송...

 

지리상으론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으로 명명 되는 곳이다.

그곳은 내겐 절망의 땅 이었고, 한편으론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토양이 되주기도 한 곳 이었다.

 

찌 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의 말... 난 청송 교도소로 옮겨 졌다. 아내는 변함이 없었다. 서울에서 그곳까지 면회를 오려면 당시엔 꼬박 이틀을 소비해야 했다. 지금이야 새로 길을 뚫어서 승용차로 서너 시간이면 가능 하지만, 당시엔 차로 거의 일곱,여덟시간이 걸렸었다. 면회가 가능한 시간은 아침 아홉시 부터 오후 다섯시... 면회 접수하고 영치금 넣고, 음식물 같은 거라도 차입하려면 늦어도 오후 네시까진 그곳에 도착해야 가능 했다. 면회 횟수 또한 월 2회로 제한돼 있을 때이니 한번 왔을때 면회를 하고 나면, 아예 진보 읍내에서 하룻밤을 자고서 그 다음날 면회를 하고 가는게 훨씬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방편이니... 도합 이틀이 걸리는 셈이었다. 

 

미 결수 에서 기결수가 되어 청송으로 옮긴 후에도 난 아내를 철저히 속였다. 아내는 지나간 일은 그냥 다 묻고 잊어버리자고 했다. 난 순순히 그러마고 했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내 청춘과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의 행복을 모조리 앗아가 버린 그들을 단 한사람 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과 연 그 모든 일의 근원엔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감정의 무절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된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당시엔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목표 만이 날 먹게하고 자게하는 이유가 됐던 것이다.

당연히 수형 생활도 반항적이 될수밖엔 없었고, 누가 옆에서 싫은 소리 한마디만 해도 자제심이 아예 없었던 난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교 도관을 두들겨패는 사고가 났다. 난 그때서야 처음으로 악명(?)높은 그곳의 현실을 겪게 된다. 손목엔 수갑을 두개나 채우고도 2.5미터 정도의 길고 굵직한 쇠사슬로 또다시 팔목을 한바퀴 감은 후, 쇠사슬을 허리쪽으로 바짝 당기면 양손은 허리쪽으로 바짝 움츠려 지고, 그렇게 허리를 한바퀴 감는다. 그렇게 되면 양손을 머리위로 올릴 수도 없고 등뒤로 돌릴 수도 없이 허리쪽에만 고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쇠사슬을 다리쪽으로 내려 양쪽 발목의 넓이를 30센티 정도만 벌린 채 감은 후에 자물쇠로 양쪽 쇠사슬을 걸어 잠궈 놓는다. 그렇게 해 놓으면 달리기란 엄두도 낼수 없고, 걷는 것 조차도 자박자박 종종 걸음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그 안에서 사고를 친 문제수들에게 징벌이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인권유린을 했던 것이다.

 

하 루 세끼 외엔 아무런 음식물도 차입이 안돼고, 면회나 편지등도 일채 금지! 난 더더욱 악받친 놈으로 변해갔고, 날 그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증오심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한달에 두번, 그것도 오분밖에 허용이 안되는 면회였지만 아내를 볼수 없고, 아내의 편지를 읽을 수 없다는 건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청 송의 겨울이란 정말 말할수 없이 춥다. 하필이면 독방에 갇혔을 시기가 한 겨울인 12월 말에서 2월까지 였다. 취침 시간이 되기 전엔 모포 한장도 일체 지급이 되지를 않는다. 하루종일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다거나,  너무 추워서 견디기 힘들땐... 앉았다, 일어섰다만을 반복하면서 체온의 저하를 막는게 유일한 방편이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도저히 인간으로 사는 게 아니다!' 사육되는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오기와 증오로 야수처럼 으르렁 거리기만 하던 나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서 비롯이 된다.

독방에선 징벌자들에 한하여 2주에 한번씩 정해진 요일에만 10분 정도 온수로 샤워를 하게끔 해줄뿐 그전엔 일체 허용이 안된다. 그러니 목욕날이 오기 전엔 그저 양치질에 고양이 세수 정도로 2주를 기다려야만 한다.

 

날씨는 너무 춥고, 뒤집어 쓰고 있을 담요 한장 주지를 않으니 잠시라도 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유일한 운동거리인 앉아 일어서기라도 하곤 했는데... 백개 이백개론 어림도 없을 만큼 그곳은 춥다.

그 래서 한번 시작하면 3천번씩을 정하고서 그짓을 하는데 하고 나면 몸에 땀이 나고 숨은 턱끝에 걸린다. 헉헉 거리며 털썩 주저앉으면 거짓말처럼, 30초도 안돼서 다시 추워진다. 아니, 그짓을 하기 전보다 더 추위를 느낄수 밖엔 없다. 몸을 적신 땀이 식으면서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으니...

 

그러면 또다시 그 짓을 해야만 한다. 아마도 하루에 몇만개 씩은 그 짓을 했던 것같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난 무릎 관절이 별로 신통치 못하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어 느날 이었다. 문득 어디선가 시큼하면서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걸 인지하고 두리번거리다보니 다름아닌 바로 내 몸에서 풍겨나오는 악취였다. 그도 그럴것이 하루종일 수십번씩 겨드랑이에 땀이 났다가 식었다를 반복하니 2주동안 씻지도 못하는 그 땀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그리고 이틀에 한번이건 매일이건 배변을 보고나서 아무리 여러번 휴지로 닦는다해도 아주 약간씩의 잔향이 몇일을 묵으면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던 것이었다.

 

살면서 내 자신이 그렇게 추하고 역겹게 느껴진적은 처음이었나 보다. 죽고 싶을만큼 수치감이 내 온몸을 휘감아 돌면서 '아! 나란 놈... 참으로 하찮은 존재 였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내가 살아온 지난 날들이 스크린 속 장면들과 같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 무리 힘든 일이라도 지금의 이 순간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이 있었을까? 이것보다 못한 삶이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그렇다면... 어디 한번 살아보기나 해볼까?란 생각이 조금씩 밀려들더니 그래! 한번 살아나보자...에서 살아보고 싶다란 생각까지... 

난 그날 그렇게, 내 몸속에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모든 찌꺼기들을 털어 버리겠다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을 향한 원망도, 증오도... 이제 남은 건 오로지 하나뿐... 내 아내와 내 아이들... 바로 내 가정이었다.

징 벌 만기를 종료하고 독방에서 나오던 날... 난 마치 출소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두달 정도 받아보지 못하고 보관되어 있던 편지들이 한꺼번에 수십여통 내게 건네졌다. 밤이 새도록 한통 한통 아내의 편지를 정성스레 꺼내어 읽어 내려 가던 중... 유독 가슴을 찌르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오빠! 난 정말로 나쁜 아내 인가보다. 오빠를 그곳까지 가게 한건 피해자나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나였어. 내가 오빠에게 좀더 사려깊게 내조를 못했기 때문에 오빠가 그렇게 된거야... 

 

오빠 미안해. 그리고 바보같은 아내를 용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