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 평강 공주!!!

 

늦은 오후... 연락을 받고 온 교통계 직원들에 이끌려 난, 아산 경찰서로 이첩이 되었고, 유치장과 천안 구치소, 그리고 재판을 거쳐 정확히 85일... 크리스마스를 몇일 앞둔 12월의 어느날, 난 세상의 빛을 다시 볼 수가 있었다.

 

징역 일년에 집행유예 이년...

"벌써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넌 몇달 더 썩어야 하는 건데..."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너에게 출소 소식을 알리고자 전화를 거니 농담투로 내게 던진 말 이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 넘겼지만,  당시로선 그 말이 오너의 반진심 이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어떤 이유로 난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모여 만든 자리... 이른바 나의 사회복귀로의 축하 자리가 준비 되었다는 장소로 이동 하면서야 아내와 첫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마중 못 나가서 미안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못가서 서운했지?" 아내는 끝내 내게 숨겼다. 아내는 그림 얘기만 나오면 질색을 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그건 아내의 어린 시절, 장모님의 예술 계통으로의 심한 집착에서 비롯 되었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내는 학교와 집, 미술 학원만이 전부여야 했고, 미대에 입학 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런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던 아내는, 급기야 가족들 모르게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가 반년만에 장모님의 손에 의해 귀국, 복학으로 이어져 다시 그림 공부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림 자체가 싫었던 건 아니지만, 장모님이란 타의에 의해 그림이라면 질색을 했고, 나와 살아오면서도 철저히 그쪽을 외면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아내가 내 변호사비등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그쪽 일에 몸을 담은 것이었다. 낮엔 아내의 친구가 운영 하는 미술 학원에서 수험생들을 가르치고, 밤엔 상가 건물... 심지어는 업소의 벽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 까지도 자청해서 쉴틈없이 일을 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됐다. 출소 날도 아내는 그래서 올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불로 받은 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날 밤, 아내와 난 서로 취하도록 술을 마셔댔다. 아이들의 모습이 눈 앞에 선했지만 아이들을 보러 갈 시간을 낼수가 없었다. 청평에서 진행 되는 종합병원 공사에 두어달 정도 현장 관리를 하다가 어느정도 기틀이 잡히면 다시 안양 병원으로 복귀하라는, 그래서 다음날 새벽부터 함께 청평으로 출발 하자는 오너의 지시에 안양 반경을 벗어날 시간적인 여유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이젠 죄값도 다 치뤘으니 숨어 살 이유도 없고, 집으로 돌아와 다들 함께 지내게 될줄로만 철썩같이 믿었던 아내는 또다시 몇달을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내 말에 많이 실망 했던지, 아무 말 없이 소주만 마셔댔다. 취했으니 그만 하라는 내 말을 뿌리치며 아내는 연거푸 소주잔만 기울였다. 같이 살면서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다른 것도 아닌 일 때문에 잠시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아내에게 순간 짜증이 나려고 했다.

 

벌컥 화를 내고 아내의 손을 잡아 끌자 그제서야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를 걸으면서 한동안 서로 말이 없던 우리는 아내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침묵의 균형이 무너졌다.

 

"여보, 나 실은... 내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그 일을 또 했었다. 지금도, 당분간은 해줘야 하고... 그리고 나 룸싸롱 벽화도 그려줬다... 난 싸구려 그림쟁이로 내 자존심을 팔았다고 친구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해도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싫은 것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그래서 조금의 주저도 없이 친구를 찾아가 부탁을 했고, 일을 맡았던 거야. 근데... 또 몇달을 떨어져 지내야 한다니까 너무 속 상하고, 맥이 빠진다..." 술김에 나온 말이리라... 평소의 아내라면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자존심을 버릴 아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말로 날 아프게 할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파옴을 느꼈다. 난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기에... 아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마음 속으로 다져먹고 있었던가 싶다.

 

한참의 침묵 후에 난 기어코 "현주야! 아무래도 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수 없는 놈인가 보다. 우리 그냥 이혼 하자!" 라는 말을 뱉고야 말았다.

 

사랑해서, 정말로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 삼류 영화나 멜로드라마에서 흔히 들어왔었고, 그때마다 코웃음으로 일관해온 나 였다. 근데 그런 내가, 그런 심정으로 아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놈이 아닌, 성격 좋고 평범한 사람 만나서 결혼 했더라면 얼마든지 사랑만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여자 였다. 최악의 조건만 두루 갖춘 남자 만나 세상의 온갖 험한 꼴은 다 겪어야 했던 여자... 뒤늦게나마 평범한 행복 속으로 아내를 보내주고 싶었다. 보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요동을 치면서 가슴이 터질듯 답답해 왔다. 

 

순간, 걸음을 딱! 멈춘 아내가 뜨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 보았다. 난 지금도 그때, 아내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밝게 웃고, 일상의 수다를 떠는 아내를 바라보다가도 그때의 그 표정이 떠오르면 가슴 한켠이 아릿하게 아파오곤 한다.

커다란 눈망울에 야속함과 원망이 가득 담기는가 싶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 여전히 아내의 눈물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아내는 일말의 흐느낌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울지말라는 말도 꺼낼수가 없었고, 아내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용기조차 내 의지를 거부 했다.

 

한동안 눈물만 흘리던 아내가 급기야 말을 꺼냈다. "날더러 죽으라는 얘기야? 난 오빠 없으면 죽어... 우리 아이들에겐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내겐 우리 아빠나 엄마 보다도, 우리 아이들 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 바로 오빠야... 그런 오빠가 나랑 헤어지자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말 인거야..." 끝내 아내는 길가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 했다.

 

절대로 추위가 아니었는데... 온몸이 떨려오면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허겁지겁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한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채 그냥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리고 사람들 시선에 아랑곳없이  아내앞에 무릎을 꿇고, 나 역시 펑펑 울어 버렸다.

 

잠시후... 볼에 아내의 손길이 느껴졌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아내가 내 눈가로 흐른 눈물을 꼼꼼히 닦아주면서 나즈막하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당신의 모든 걸 사랑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내게 의지가 되는 사랑은 바로 당신으로 인한 든든함 이에요... 당신이 있기에 나랑 우리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건데 바보같이... 앞으론 절대로 오늘처럼 나약한 마음 먹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역시 현명하고 발이 빨랐다. 늘 나보다 한수 빠르게 앞서 나간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 얼른 일어나!" 내 손을 끌어 일으키고 엉덩이를 툭툭 터는둥, 내 무릎을 털어주는둥, 부산을 떨더니 씩씩하게 팔짱을 껴왔다.

 

"내가 처음 오빠한테 뭐 보고 반했는지 알어? 오빤 만원어치 술을 마셔도 늘 당당하고, 백만원어치 술을 마셔도 늘 겸손하다는 거... 그리고 늘 변함이 없다는 거..." 재잘 거리고도 쑥쓰러웠는지... 이내 쨍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외쳐댄다.

 

"우리 2차 마시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