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은 "필리핀, 너 때문이야"... 역사적으로도 가까운 이웃
유코피아_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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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한국에서 범죄를 짓고 대부분 미국으로 달아났지만 요즘은 1순위 도피처가 필리핀이다. 미국과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어 숨어 지낼 곳이 거의 없다. 필리핀은 그러나 크고 작은 섬들이 널려있고 또 여권위조 브로커들이 많아 신분세탁이 유리하다.
최근에는 안양 환전소 여직원을 살해한 일당들이 필리핀에서 검거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필리핀에는 한국교민이 12만명이나 되며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일본, 대만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나라에 속한다.
필리핀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가깝다.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한 태프트-카츠라 밀약도 필리핀 때문에 체결됐다. 당시 미 육군장관(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 윌리엄 태프트는 시어도어(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카츠라 다로를 비밀리에 만났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서로 교환했다. 미국은 태평양의 군사 요충지이자 자국 식민지인 필리핀의 안전을 확보하는 대가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것이다. 필리핀으로 인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맞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필리핀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1944년 6월, 하와이에선 미군 최고위급 전략회담이 열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해 각군 수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필리핀을 우회해 대만과 한반도 남쪽을 점령, 일본 본토를 공격하자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됐다.
해군의 이 같은 제안에 루스벨트도 동의해 거의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맥아더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맥아더는 그때 참모총장 임기를 마치고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있다가 전쟁을 맞았다.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그는 결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필리핀을 가까스로 탈출, 호주로 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당시 필리핀에는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가 거의 1만명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 탈환을 포기하겠다는 루스벨트에 대해 맥아더는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국민들에 직접 알리겠다"며 윽박질렀다. 그의 협박성 항의에 굴복한 루스벨트는 필리핀 상륙작전으로 전략을 틀었다.
당초 전략대로 한반도가 일본 공격의 거점이 됐더라면 분단의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해 있는데 소련군이 국경을 넘을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는 필리핀이 큰 힘이 됐다. 전쟁이 발발한지 3일 후 맥아더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수원공항에 내린 그는 경호병력도 없이 노량진 언덕 위에서 아비규환이 된 한강다리를 쌍안경으로 한참동안 지켜봤다. 그러고는 참전을 결심했다. 그 이유가 바로 필리핀이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마닐라를 탈환한 맥아더는 일본군의 살륙현장을 목격하고는 치를 떨었다.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하루밤새 10만명의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한강다리에서 피난민의 대열을 보고서는 일본군의 '마닐라 대학살' 장면이 떠올라 미군 파병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 때는 한반도의 분단, 6.25 때는 공산화를 막아줬으니 필리핀은 우리와 끈질긴 인연이 있는 나라다.
한국이 인터폴에 공조수사를 요청한 해외도피사범 1,052명 중 129명이 필리핀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보도에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최근에는 안양 환전소 여직원을 살해한 일당들이 필리핀에서 검거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필리핀에는 한국교민이 12만명이나 되며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일본, 대만을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나라에 속한다.
필리핀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가깝다.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한 태프트-카츠라 밀약도 필리핀 때문에 체결됐다. 당시 미 육군장관(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 윌리엄 태프트는 시어도어(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카츠라 다로를 비밀리에 만났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서로 교환했다. 미국은 태평양의 군사 요충지이자 자국 식민지인 필리핀의 안전을 확보하는 대가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것이다. 필리핀으로 인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맞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필리핀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1944년 6월, 하와이에선 미군 최고위급 전략회담이 열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해 각군 수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필리핀을 우회해 대만과 한반도 남쪽을 점령, 일본 본토를 공격하자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됐다.
해군의 이 같은 제안에 루스벨트도 동의해 거의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맥아더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맥아더는 그때 참모총장 임기를 마치고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있다가 전쟁을 맞았다.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그는 결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필리핀을 가까스로 탈출, 호주로 가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당시 필리핀에는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가 거의 1만명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 탈환을 포기하겠다는 루스벨트에 대해 맥아더는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국민들에 직접 알리겠다"며 윽박질렀다. 그의 협박성 항의에 굴복한 루스벨트는 필리핀 상륙작전으로 전략을 틀었다.
당초 전략대로 한반도가 일본 공격의 거점이 됐더라면 분단의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해 있는데 소련군이 국경을 넘을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는 필리핀이 큰 힘이 됐다. 전쟁이 발발한지 3일 후 맥아더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수원공항에 내린 그는 경호병력도 없이 노량진 언덕 위에서 아비규환이 된 한강다리를 쌍안경으로 한참동안 지켜봤다. 그러고는 참전을 결심했다. 그 이유가 바로 필리핀이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마닐라를 탈환한 맥아더는 일본군의 살륙현장을 목격하고는 치를 떨었다.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하루밤새 10만명의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한강다리에서 피난민의 대열을 보고서는 일본군의 '마닐라 대학살' 장면이 떠올라 미군 파병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 때는 한반도의 분단, 6.25 때는 공산화를 막아줬으니 필리핀은 우리와 끈질긴 인연이 있는 나라다.
한국이 인터폴에 공조수사를 요청한 해외도피사범 1,052명 중 129명이 필리핀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보도에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출처-(유코피아/20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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