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필리핀 두 나라의 교류는 많아졌으나, 지난해부터 필리핀 곳곳에서 한국 교민과 관광객들이 피살돼 교민 사회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피살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4월 8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납치됐던 한국인 여성 유학생의 것으로 보이는 주검이 발견됐다. 마닐라에 있는 대학에 몇 년째 유학 중이던 이 여성은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납치됐다고 한다. 현지 경찰이 납치범 일당 중 1명을 체포해 조사를 하고 있는데, “외국인이라서 돈이 많은 것 같아” 몸값을 노리고 납치했다는 자백이 나왔다.

필리핀에는 8만명 정도의 한국인이 있으며, 그 중 유학생은 3만명 정도다. 필리핀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연 100만명에 이른다. 이처럼 교류는 많아졌으나 지난해부터 필리핀 곳곳에서 한국 교민과 관광객들이 피살돼 교민사회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4월 6일 북부 관광도시 앙헬레스에서는 교민 신모씨가 청부살인으로 추정되는 총격을 받고 숨졌다. 앙헬레스에서는 지난 2월에도 한국인 60대 남성 관광객이 괴한들의 총격에 사망했다. 현지에서 총격에 숨진 한국인 수는 2010년 6명, 2011년 7명, 2012년 6명에 이어 지난해에는 12명으로 늘었다. 한국인을 노린 강력범죄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총기가 많이 풀려 있고 치안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현금을 많이 갖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국 공장이전, 영어 조기유학 각광
지난해 필리핀 남부 타클로반이 슈퍼태풍 하이옌에 큰 피해를 입었을 때 한국의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서울 시내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캠페인을 했다. 한국과 필리핀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한국에 와서 일하는 필리핀 사람들도 많고,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자 출신의 국회의원도 탄생했다. 필리핀으로 간 한국인들도 많다. 현지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영어를 배우러 가 있는 아이들도 많다. 몇 해 전에는 필리핀의 한국계 여성 방송인이 아직 미혼인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과 연인 사이라는 보도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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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필리핀 이주사는 제법 오래됐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8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해상왕’ 장보고가 필리핀까지 찾아가 교역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근대의 기록으로는 1837년 앤드루 태곤 김(Andrew Kim Taegon) 등 조선의 천주교도 3명이 마카오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가 폭동이 일어나자 필리핀으로 피신, 롤롬보이의 수도원 부근에 기거했다고 한다. 1935년 무렵에는 의주의 인삼 상인 몇 명이 베트남을 거쳐 필리핀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2차 대전 때에는 일제에 징병된 조선 군인들이 필리핀 점령에 동원됐다. 최소 3명이 그때 필리핀 여성과 결혼해 영구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뒤 한국전쟁 때에는 반대로 필리핀 병사들이 한국에 파병됐다. 이 군인들의 한국인 아내들이 남편을 따라 필리핀으로 옮겨갔다. 1960년대에 약 30명이 필리핀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필리핀 이주가 본격화한 것은 한국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면서였다. 1980년대에 몇몇 공장들이 필리핀으로 사업장을 옮기면서 한국인 관리자들과 가족들이 필리핀에 머물게 된 것이다. 1990년대가 되자 필리핀에 이민해 사업하는 한국인들은 대기업 주재원들이나 공장 관리자들을 넘어 소상공업자, 서비스업 종사자 등으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한인사회가 커지면서 한인 네트워크의 내부 수요가 이런 이민을 이끌었고, 이민자 사회 내부 비즈니스가 커졌다.

또 다른 물결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필리핀에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 숫자가 급증한 것이다. 필리핀 이민국(BI)이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비자발급 제한을 완화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한인들의 필리핀 주류 사회 진입도 늘었고, 양측의 이해관계가 깊이 얽혀들어갔다. 예를 들어 필리핀 금융전문가협회는 2002년 적법한 비자 없이 필리핀에서 활동해온 한국인 사업가들의 지위를 보호해주기 위해 움직였고, 여행사 연합단체는 필리핀 정부를 설득해 한국인 관광가이드들의 비자와 자격증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월 800~1000달러를 쓰는 필리핀 경제의 소비 주역이다. 한국인들이 필리핀에서 쓰는 돈이 연간 1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한류와 한국 패션이 필리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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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선교활동과 섹스관광 등 잡음
필리핀 한인들과 현지 주민들의 관계가 늘 좋을 수는 없다.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 선교활동이다. 1974년 마닐라 한인연합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한국 개신교 교회들이 마닐라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한국 교회들이 가톨릭인 필리핀 사람들을 ‘복음화’하겠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본다.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빈민 구호활동을 하는 한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는 “한국 선교사들의 공격적인 활동이 현지 주민들과의 관계에서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고 토로한다. 1980년대에 통일교가 필리핀에서 대형 합동결혼식을 한 것도 그들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비쳤고, 한인들의 교회 문화가 현지 문화랑 분리돼 있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최근 불거진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남성들의 ‘섹스관광’이다. 1992년 필리핀을 찾은 한국 관광객 수는 2만6000명, 1997년에는 18만명이었다. 2003년에는 30만4000명, 2006년 57만명, 2011년에는 92만5000명으로 한국 관광객은 급증했다. 따라서 필리핀 입장에서 한국은 중요한 관광 수입원이기도 하지만 부작용도 많다. 특히 한국 남성들의 성매수로 태어난 아이가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중 9000명이 2003~2008년에 태어났다. 필리핀 여성이 한국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뒤 낳은 아이를 코피노(Kopino)라고도 하고, 현지 속어로는 코리노이(Korinoy)라고도 한다. 세부의 ‘코피노 파운데이션’에 따르면 이 아이들 엄마의 85~90%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이나 성매매 여성이다. 아빠는? 알 수 없다. 한국으로 휑하니 떠나가 연락을 끊은 남성들이라는 것밖에는.

세부섬 같은 관광지에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호텔이나 식당이 많은데, 현지에서 고용한 직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 시집온 필리핀 신부들 문제도 있다. AFP통신은 지난 4월 10일 한국 정부가 필리핀 여성들과 한국 남성의 결혼을 규제하려 한다면서 “그보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신부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고 보도했다. 이제는 한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나라가 된 필리핀이지만 그만큼 신중하게 풀어가야 할 문제들도 많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