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다는 남편은 일용직 노동자, 술마시면 때려 4세 아들과 '탈출'

컨테이너 전전, 남편 사망도 몰라… 미취학 아동 신고, 경찰이 찾아내

 

필리핀 라구나주(州)의 빈민가에 살던 안젤라(가명·33)씨는 지난 2007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한국으로 시집왔다. "한국으로 시집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괜찮은 한국 남자가 있다"는 결혼중개업자의 말을 듣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두 살 터울의 언니가 한국 공장에서 벌어다 부치는 돈으로 홀어머니와 근근이 살고 있던 안젤라씨에게 한국은 그때까지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돈이 꽤 있다던 남편(56)은 일용직 노동일을 전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남편을 믿고 서울의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1년 만에 아들도 얻었다.

'코리안 드림'이 지옥 같은 한국살이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평소엔 온순한 듯하던 남편은 술만 마시면 돌변해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안젤라씨에게 마구 집어던졌다. '말이 안 통해 답답하다'며 막무가내로 손찌검하는 일도 잦아졌다. 그때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들 때문에 참았다. 하지만 수년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 안젤라씨는 견디다 못해 결혼 5년 만인 2012년 7월 네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서 집에서 도망쳤다.

그로부터 4년 가까이 흐른 지난 18일 서울 성북경찰서에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됐다. 장기결석·미취학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 방침에 따라 서울 안암초등학교가 "작년에 입학했어야 할 아이 한 명이 아직 입학하지 않았다"며 신고한 것이다. 안젤라씨의 아들(8)을 찾는 전화였다.

아동 학대를 의심하고 조사에 나선 경찰은 작년 4월 뇌졸중으로 숨진 안젤라씨의 남편이 지난 2012년 안젤라씨가 아들을 데리고 가출했다고 신고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가출신고를 접수하고 조사한 서울 서초경찰서는 '경기도 한 도시에서 안젤라를 찾았으나 가정폭력 피해자로 확인돼 가출 사건을 종결한다'는 기록을 남겨뒀다.

성북경찰서는 이를 바탕으로 이 도시에 있는 공장 60여곳과 다문화공동체 20여곳을 수소문해 지난 19일 한 전기패널 공장에서 안젤라씨를 찾아냈다.

경찰을 본 안젤라씨는 놀라서 뒷걸음질부터 쳤다고 한다. 남편이 숨진 사실을 모르고 있던 안젤라씨는 경찰을 남편이 자신을 찾기 위해 보낸 사람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안젤라씨는 그동안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도 개통하지 않고 사람들과 접촉을 꺼린 채 숨어 지냈다. 안젤라씨는 "남편이 우리 모자를 찾아낼까 봐 마음을 졸이면서 컨테이너 박스를 전전했다"며 "결혼 생활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안젤라씨의 여덟 살 난 아들은 한국에 없었다. 안젤라씨가 아들을 2013년 필리핀 친정집에 맡긴 것이다. 그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 100만원 중 80만원을 필리핀 친정집에 송금해 아들을 한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안젤라씨에게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집 전세보증금 3500만원을 전달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안젤라씨는 "한국에서 돈 벌어서 필리핀에 있는 아들을 대학 공부까지 시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