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체포권 없는데다 영장 발부도 수개월씩 소요"

지난해 12월 필리핀 바탕가스주에 살던 한국인 조모(57)씨가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진지 80여일이 흘렀지만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필리핀 경찰 수장은 물론 최근 검찰총장까지 한국을 찾아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지만 범인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특히 사건 발생 직후 한국 경찰관들이 이례적으로 현지에 파견돼 직접수사에 가까운 공조수사까지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필리핀 검찰과 경찰 등 양대 수사기관 최고위급까지 나서 범인 검거를 약속했지만 성과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경찰 결정적 증거 발견 

필리핀은 수천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로 한국 교민 약 9만명 상주하고 있다. 

해마다 한국인 관광객과 유학생 120만명이 필리핀을 방문하지만 지난 3년간 34명이 강도와 청부살해로 목숨을 잃는 등 치안불안 국가로 분류된다. 

지난해 12월 20일 새벽 필리핀 중부 바탕가스주 말바르시에서 건축업에 종사하던 조씨가 괴한들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직후 한국 경찰은 이례적으로 4명으로 구성된 수사팀을 현지에 급파했다. 

때마침 지난해 11월 초 강신명 경찰청장이 필리핀을 찾아 한국인 대상 범죄에 수사력을 집중해 달라고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한달 전인 10월 20일에는 마르셀로 포야완 가르보(Marcelo Poyaoan Garbo Jr.) 필리핀 경찰청 차장이 한국을 찾아 "한국인 피살 사건 등 강력범죄와 관련해 최고 수준의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김진수 경위(현장감식)와 이상경 경사(범죄분석),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김희정 행정관(영상분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김동환 박사(총기분석) 등 4명은 현지에서 필리핀 경찰들도 놓친 수많은 증거들을 찾아냈다. 

김동환 박사는 조씨가 피살된 현장 건물 구조와 목격자 진술 등을 토대로 총기 발사 위치와 잔류 화약 검사를 통해 필리핀 경찰이 발견하지 못한 45구경 권총 탄피 2개와 22구경 소총 실탄 1개를 추가로 수거했다. 

김진수 경위는 현장 재감식을 통해 발견된 탄피에서 장갑흔을 찾아냈다. 

특히 김희정 행정관은 새벽 시간대에 찍힌 저화질 CCTV 화면을 영상보정해 현장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흰색 SUV 차량을 특정하고 번호판 일부까지 확인했다. 

용의 차량 번호판 분석은 용의자들의 도주 동선 추적에 결정적인 것으로 필리핀 경찰 입장에서는 최고의 증거물을 얻은 셈이었다. 

◇ 수사능력 떨어지고 법체계도 우리와 달라 

지난 9일 한국을 찾은 클라로 아레야노 필리핀 검찰(NPS)총장은 김수남 검찰총장과 만나 강력 사건에 대한 수사공조를 약속했다. 

함께 방한한 비르힐리오 멘데스 국가수사국(NBI) 국장은 "중요 증거를 더 수집한 이후 용의자를 특정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겠다"며 "한국인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길 바라고 나오더라도 사건이 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조씨 사건 수사는 필리핀 지방경찰청에서 미국 FBI격인 국가수사국(NBI)으로 이첩됐다. 

하지만 필리핀에 급파된 한국 경찰들이 결정적 증거를 넘긴지 3개월이 다되도록 범인들의 행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6자리 번호판 중 대부분을 해독해 용의 차량을 10대 안팎으로 축소시켰지만 최종 용의차량은 아직 특정되지 못했다. 

차량주인과 실제 운전자가 다른 경우가 허다한 데다 위조 등록 번호판도 많기 때문이다. 

필리핀 내 한인피살 사건 수사에 속도가 붙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통신수사와 체포 영장 발부에만 통상 3~6개월 이상 소요되는 법체계도 한몫한다.  

차량 운전자들을 용의자로 특정한다 해도 청부살해 관계를 밝히기 위해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살피는 데만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또 우리나라와 달리 긴급체포권 자체도 없어 현행범이 아닌 경우 용의자 신병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에는 긴급체포 제도가 없고 각종 영장을 발부 받는데만 몇달씩 걸린다"며 "신속한 수사를 위한 기반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 외곽 카비테주 자택에서 박모(68)씨도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필리핀 경찰은 흉기에 찔린 상처가 깊지 않다는 점, 가정부가 사건발생 당일 집에 왔다는 점, 이웃집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점 등을 밝혀낸 한국 수사팀의 조언으로 20대 초반 현지 여성 A씨를 검거했다. 

하지만 조씨 사건과 같이 현장을 떠난 살인사건 용의자의 경우에는 CCTV 추적도 어려운데다 현장감식 능력도 현저히 떨어져 검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지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29건(33명 사망)의 한국인 피살 사건이 발생했지만 피의자를 잡은 경우는 14건으로 검거율은 48.3%에 머물렀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 경찰 예산은 우리나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며 "결국 수사의지가 우리와 같지 않기 때문에 수사가 더디게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