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302045_0.jpg

밑바닥 삶 전전하다 고국서 구속

어려울 때 도와준 후배를
항공료·숙소 마련해주고 세부 가이드 일까지 알선
한살 터울 고향 후배를 해치고 금품 챙겨 도망

 

11년 전 필리핀에서 한인 후배를 살해한 전모(41)씨가 국내에 들어왔다가 최근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에 구속됐다. 그는 필리핀 교도소에서 5년간 복역한 뒤 여러 섬을 전전하다 결국 한국행을 택했다고 한다.

자신을 도운 후배 살해

2005년 5월 필리핀 세부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하던 지모(당시 28세)씨는 비자 갱신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 오랜만에 한 살 터울 고향 선배인 전씨를 만났고, 지씨는 마땅한 직업이 없던 전씨에게 필리핀에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한 달 뒤 그들은 함께 필리핀으로 갔다. '착한 후배'였던 지씨는 비행기 값도 대신 내줬고 세부 라푸라푸시티에 있는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선배에게 내줬다. 방 세 칸짜리인 지씨의 집에는 지씨와 지씨의 약혼녀, 가정부가 살고 있었다. 지씨의 소개로 전씨는 여행 가이드 일자리도 얻었다. 하지만 전씨는 영어는 물론 현지어를 몰라 가이드 업무에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은 넉 달 뒤인 그해 10월 벌어졌다. 술에 만취한 전씨는 새벽 5시 30분쯤 귀가했다. 당시 지씨의 약혼녀는 마닐라 출장을 떠나 집에는 지씨와 가정부만 있었다. 전씨는 자고 있던 지씨를 깨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둘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고, 전씨는 부엌에 있던 흉기로 지씨를 두 차례 찔렀다. 지씨는 현장에서 숨졌고 전씨는 지씨가 차고 있던 목걸이와 커플 반지, 지갑 속 50달러를 챙겨 서둘러 집을 떠났다. 가정부가 달아나는 전씨를 목격하고 현지 경찰에 신고했고, 전씨는 세부의 한 호텔로 몸을 숨겼으나 그날 밤 한인들 제보를 받고 출동한 필리핀 경찰에 체포됐다.

교도소에서 아이 둘의 아빠로

전씨는 세부 라푸라푸교도소에 수감됐고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그런데 필리핀 재판 시스템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재판 기간이 따로 정해진 게 없어 사건 발생 2년 만에 첫 재판이 열릴 때도 있다. 또 경찰과 검찰의 수사 기록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법정에서만 진실을 가리는 철저한 공판 중심주의 제도를 따른다.

전씨의 1심 재판도 5년 가까이 걸렸다. 지씨를 살해한 사실을 자백했으나 2010년 세부 법원은 '공소 기각'으로 전씨를 석방했다. 재판에 필요한 형식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 공소기각 처분이 나오는데, 이 사건 핵심 증인이자 목격자였던 가정부가 고향으로 돌아가 법원과 연락이 두절됐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이 전씨는 필리핀 교도소에서 자녀 둘을 둔 가장이 됐다. 그는 다른 재소자로부터 필리핀 여성을 소개받아 교도소에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여성이 면회 오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동료들이 자리를 비켜줘 둘만의 공간을 마련해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씨의 필리핀 현지처는 2007년과 2010년 딸 둘을 낳았다. 돈 많은 재소자는 토요일에 교도소 밖으로 외박 나갔다가 월요일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살인범 결국 한국 법정에

라푸라푸 교도소를 나온 전씨는 타이어 판매점, 옷가게 등에서 일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지처의 고향인 민다나오로 가서 처가살이를 했다. 민다나오는 필리핀 남부의 큰 섬으로 이슬람 반군이 출몰하는 지역. 전씨는 그곳에서 현지처 가족 30여명과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생활고는 계속됐고 전씨는 다시 세부로 돌아와 한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했다. 전씨는 필리핀 이민국에 의해 강제추방당하는 방법을 생각했으나 불법 체류에 따른 벌금 1100만원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그 계획 대신 한국대사관 세부 주재관을 찾아가 무료 강제추방을 호소했다. 올해 초 불법체류 경위를 조사하던 주재관(한국 경찰)은 전씨가 살인사건 피의자라는 사실을 파악해 서울경찰청에 통보했다. 경찰 관계자는 "전씨는 현지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생각한 데다, 한국에서 재수사를 받는다 해도 증거가 부족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세부 주재관은 전씨 동향을 감시하는 한편 필리핀 당국에 각종 수사 기록을 요청했고, 서울 수사팀은 피해자인 지씨 가족과 지씨의 약혼녀를 접촉하는 등 재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혐의를 입증할 증거 자료가 모두 세부에 있었기에 필리핀 당국의 협조가 절실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필리핀 당국은 과거 수사 기록과 증거물을 모두 보관하고 있었다. 11년 전 전씨와 가정부의 경찰 진술서는 물론 사건 당일 세부 경찰서에서 전씨가 우리말로 쓴 진술서와 부검의 소견까지 한국에 보내줬다는 것이다. 또 범행에 이용됐던 흉기도 세부 법원 증거물 창고를 뒤져 찾아냈다. 수사팀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빠른 협조에 우리도 놀랐다"고 했다. 작년 11월 강신명 청장은 필리핀을 직접 찾아 한국인 사건 협조를 요청한 적이 있다.

지난 4월 30일 전씨는 11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사건 재구성을 마친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고 전씨는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지씨의 어머니는 큰아들의 죽음을 애통해오다 10년 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유정규 국제범죄수사4대 대장은 "외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범인을 신속한 수사 공조로 우리 법정에 세운 사례"라며 "전씨는 한국에서 구속될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