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가득 메운 필리핀 민중들 앞에 당시 야당 지도자 코라손 아키노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엄은희의 내가 만남 동남아_6] EDSA, 지금은 빛바랜 필리핀 민주화의 공간 당신에게 6월은 어떤 달입니까? ‘국민’학교를 졸업한 필자에게 6월의 오랜 기억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때가 되면 반공웅변대회와 반공포스터 경진대회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목소리 크다는 이유로 중1 때 학교대표 웅변소녀가 될 뻔했는데, 다행히(?) 목감기가 찾아와 오래 부끄러웠을 그 이벤트를 인생에서 지울 수 있었다. (흑역사를 B급 재미로 살려낸 《우익청년 윤성호》의 윤성호 감독님, 존경합니다!) 6월이 좀 다르게 다가온 것은 2016~17년 가을에서 겨울 동안 광화문거리에서 뜨겁게 촛불을 들면서부터이다. 천만 시민의 몸과 마음을 움직인 각자의 동력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촛불항쟁의 힘으로 탄핵인용과 장미대선에 이르던 일련의 과정은 소위 ‘87년 체제’의 헌법적 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이유로 그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2010년 이후 줄곧 제기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상황과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과제가 남은 상황에서 개헌의 긴요성은 설득력이 아직은 없고, 개헌 전까지 우리는 87년 체제 안에서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 이 체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87년 6월 항쟁의 산물이다. 지방의 국민학교 6학년생에게는 너무나 멀었던 87년 6월의 열기와 의미를 나는 영화 《1987》과 두 해 전 겨울 촛불을 들고난 뒤에야 비로소 나의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의 6월 항쟁과 자주 비교되는 필리핀의 민중항쟁은 한해 전인 1986년에 있었다. 한-필 양국 상황을 현재의 잣대로 보면 그 의미가 퇴색되어버리지만, 사실 필리핀의 1986년 2월 피플파워는 한국의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대만의 1987년 7월 계엄령 해제, 중국의 1989년 6월 텐안먼 시위로 이어지는 아시아 탈권위주의 도미노현상의 가장 앞머리에 있던 역사적 사건이다. 서중석은 『6월 항쟁』(돌베개, 20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리핀의 ‘피플 파워’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리전쟁이었다. 학생들과 민주 인사들은 필리핀의 민중혁명이 실패한다면 당분간 우리 민주주의는 곤경에 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똑같은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그것이 실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121-122) 피플파워와 6월항쟁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국가의 관점에 갇히면 보이지 않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격동과 미국의 불가피한 아시아전략 수정이란 큰 역사의 분기가 이루어진 동시대적 사건이다. 한국의 6월 항쟁 1년 전 펼쳐진 필리핀의 민주항쟁 명동과 종로, 을지로와 같은 혁명의 중심 EDSA 도로 코로나19로 텅 빈 거리, 충격과 걱정 필리핀의 이 항쟁은 1986년 2월이라는 시간 중심이 아니라 피플파워 혁명 혹은 에드사 혁명(EDSA Revolution)으로 더 알려져 있다. 여기서 에드사는 특정 장소, 정확하게는 도로명으로, Epifanio de los Santos Avenue(EDSA)의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두문자어이다. (참고로 Epifanio de los Santos는 스페인에 대항했던 필리핀 항쟁을 기록한 필리피노 역사가이다.) 이 도로에서 1986년 2월 23~25일 동안 20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마르코스 독재 타도를 외쳤다. 앞서 2월 7일 있었던 조기대선의 결과는 마르코스의 승리로 발표되었지만, 신뢰하기 어려운 부정선거였다. 멀게는 1960년대 말 반전운동에서 시작되어 가까이는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암살 이후 형성된 필리핀의 反독재-反마르코스 진영의 저항도 가속화되었다. 학생과 민중조직들, 경제실정에 실망한 중산층, 가톨릭 교계가 광범위하게 결집하며 노란색 리본을 흔들어댔다. 계엄 시대를 지나며 몸집을 크게 불린 군대가 이 순간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反마르코스 진영에 합류한 결과, 항쟁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 1986년 2월 25일. 이날 오전 필리핀에서는 두 명의 대통령 취임선언이 있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코라손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의 부인)는 그린힐스라는 EDSA 인근 군대 캠프 안에서, 여전히 선거승리를 주장하는 마르코스는 말라까냥 대통령 궁에서. 하지만 EDSA를 가득 메운 필리핀 민중들 사이에서는 당연하게도 아키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더욱 강력했다. 미국의 전화까지 받은 마르코스는 결국 그날 오후 패배를 인정하고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가족들과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마르코스의 21년 독재는 그렇게 종식되었다. 오늘날 EDSA는 메트로마닐라 시민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도로이다. 서울의 도로망으로 이해하자면, 사직로 + 세종대로 + 한강대로 + (용산기지로 인한 왜곡을 감안하면) 서빙고로 + 강남대로를 통칭해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셈이다. 메트로마닐라도 서울처럼 파식강(Rasig River)이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데, EDSA는 이 거대 수도의 메인도로로 수도의 요지를 다 지난다고 보면 된다. 특히 퀘존시티-쿠바오-만달루용-마카티-파사이 구간은 왕복 10~12차선에 가운데에는 우리의 지하철 1호선과 같은 지상철인 MRT 라인까지 더해져있다. EDSA의 첫인상. 차가 너~무 많다. 늘 막힌다. 10차선 도로를 차들은 12차선처럼 다니기도 한다. 박사논문을 위한 장기체류 시절 이 도로에서 발이 묶여 비행기를 두 번 놓쳤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도로를 타려면 언제 어떤 교통수단으로 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에 필리핀의 강남 마카티와 필리핀국립대학교가 있는 강북의 퀘존시티에서 같은 날에 약속이 있다면? 그러면 몸수색과 가방수색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승객들로 꽉찬 MRT에 내 몸도 구겨 넣을 각오를 해야 겨우 맞출 가능성이 높다. 필리핀 체류와 방문 이력이 좀 되다보니 이 도로를 나도 숱하게 지나다녔다. 버스로, MRT 전철로, 서민의 발 지프니로, 택시로, 아주 최근에는 앙카스라는 오토바이택시의 뒷좌석에 매달려서. 그렇게 자주 지나다녔던 이 도로와 그 도로명이 붙은 민중항쟁을 최근 두 개의 사건을 통해 되새겨본다. 첫 번째 사건은 ABS-CBN이라는 한 필리핀 방송국의 송출 중단. ABS-CBN은 필리핀 최대의 민방으로 채널도 여러 개이고 뉴스와 예능과 드라마와 음악 등 다양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방영한다(한국 드라마도 많이 소개됨). 이 방송사는 1972년 계염령 직후 강제폐국 당한 적도 있다. EDSA 항쟁이 성공한 86년에 재개국했고, 필리핀 방송법에 따라 1995년 25년간 유효한 방송면허를 발부받았다. 그런데 이 면허갱신을 둘러싸고 작년부터 필리핀 언론계가 시끄럽다. 이유는 두테르테 대통령과의 불화. 2016년 대선 캠페인 때부터 두테르테 당시 후보는 ABS-CBN에 불만이 많았다. 방송이 편파적이다, 불공평하다는 비판을 해왔고 당선 이후에도 “무례하다” “문을 닫아 버리겠다”와 같은 거친 언사가 이어져 나왔다. 방송국 대표는 대통령에게 사과의 제스처를 취해도 봤으나 갱신요청은 국회와 통신위원회의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고, 지난 5월 5일부터 방송송출도 전면중단되었다. 현재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은 TV와 라디오가 아니라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스트리밍되고 있다. 면허갱신 논란 중이던 지난 2월 21일 밤, 나는 온라인 뉴스를 통해 방송국 사옥 앞 조용한 촛불시위 장면을 보았다. 방송국 노조, 진보적 시민, 언론계 인사들이 주류였으나 일부 ABS-CBN 소속 셀럽 연예인들도 참여한 것은 좀 인상적이었다. 방송이 멈추면 일자리 타격을 입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니까. 참가자 수는 많지 않았으나 나에겐 시위 날짜가 좀 다르게 다가왔다. 이날은 에드사 항쟁의 기념일(2/25)은 아니고, 시민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22일의 하루 전날 저녁(eve)이었다. 축제의 전야(前夜)도, 출정가를 부르는 전야(前夜)도 아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이유로(사실 두테르테 집권 이후 이 행사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축소됨) 크게 축소된 에드사 민중항쟁의 34주년을 기리는 행사로서는 나에겐 이 작은 촛불시위가 각별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사건은 텅 빈 EDSA. 이게 가능할 수도 있구나, 개인적으로 꽤 충격적이었다. 뉴스와 페친들의 사진 속에서 본 에드사 거리에는 정말이지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었다. 이유는 코로나19. 이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필리핀정부는 3월 15일부터 5월말까지 3차례에 걸쳐 수위를 조절하며 마닐라 봉쇄(lockdown)를 단행했다. 현재 필리핀은 코로나19 위기로 몸살을 겪고 있는 동남아 3개국 중 하나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동남아에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경제사회적 약자들은 이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하다. 지역봉쇄 기간 중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많았고, 어떻게든 직업을 이어간 사람들 중에는 대중교통이 막힌 까닭에 땡볕의 EDSA를 걸어서 출퇴근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최근 마닐라 체감기온은 40℃를 넘나든다.) 전세계적으로 바이러스의 종식은 아직 요원하고, 그래서 포스트코로나 논의가 나는 좀 성급해 보인다. 그렇지만 보건의료보다 더 크게 밀려오는 경제위기의 파고 앞에서, 많은 국가들이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전제로 경제활동을 위한 완화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도 6월 1일부터 지역봉쇄 완화조치가 시작되었고 EDSA 거리도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메트로마닐라 자체는 확실히 관광매력도가 많이 떨어진다. 관광자산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교통체증이 너무 심하다. 개인적으로는 나에겐 의미가 좀 다르다. 인생 처음 가본 해외도시이고, 고향과 서울과 잠깐 산 부산을 제외하면 살아도 보고 방문도 많이 했다. 니노이아키노공항에 도착하면, 아 익숙한 냄새 익숙한 열기에 ‘또 왔구나!’ 싶어진다. 아마도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되면 내가 가야할 첫 도시도 이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지리학 박사) https://www.vop.co.kr/A000014930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