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종교를 가진 분들이 많다. 대부분은 기독교이고, 소수의 사람들은 불교이다. 인간이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종교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우주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생각하다 보면 딱이 신을 부정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배후 세계를 적극 주장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거부감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 교회를 다니기도 했지만 나는 교회가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목사도 있고 집사나 장로들도 여럿 있다. 나는 그들의 종교와 관계없이 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교를 선호한다. 나는 불교를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관념론을 학습한 철학과 매칭되는 부분이 많아서 관심이 크다. 특히 산속에 있는 절을 방문하거나 스님들의 수행방식에도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불교가 강조하는 영혼의 불멸이나 윤회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많은 경우 윤회설이나 인과응보설은 현실의 고통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현실의 고통을 강조하고 내세나 천국을 내세우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의 공통 전략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배후 세계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세계에 대해 훨씬 긍정적이다. 이 세계가 고통이나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면 이 세계 안에서 풀어야지 다른 배후의 세계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무신론적 신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유물론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심론을 학습 했지만 모든 것을 마음 심(心)자 하나로 해석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종교는 하나의 생활양식(삶의 방식)이고 문화와도 같다. 각 민족마다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갖는 형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하나의 종교로 통일하려는 생각은 인간들의 다양한 삶과 의식을 획일화하려는 파시즘이나 다름없다. 종교는 문화와도 같아서 인간들의 일상의 생각이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종교와 일상 혹은 종교적 삶과 일상적 삶에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6일 동안 나쁜 일을 하다가 주일 날 하루 교회 다녀오면 세탁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평소에는 공동화되었다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만 찾는 서구의 기독교가 서구인들에게 과거처럼 영향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종교인들이 특별히 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이 세상의 고통과 부조리, 불평등과 부정의에 대해 마음 아파 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런 형태의 감수성면에서 일반인들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현실의 삶을 외면하고 현실의 고통을 다른 세계로 떠 넘기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마약 중독자처럼 현실도피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 날 다수의 종교들은 이런 태도에 책임이 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다. 종교가 아편이 아니라 '빛과 소금'의 역할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와중에 종교를 비즈니스화하면서 호의호식하는 성직자들을 보면 지옥의 마구니들보다 더 나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마구니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무지가 얼마나 심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나쁜 종교인들은 이런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을 파고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