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민청학련(民靑學聯)세대이니 틀딱 세대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당시 200명 가까운 동료 선후배들이 남산에 끌려가서 유신체제의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전과자아닌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 비해서 잡범(?)수준으로 즉결판사에게 29일을 선고받고 잡혀간 관할 경찰서 유치장에서 곽밥을 먹으며 보냈었지요, 필입국을 학수고대하며 조국(전직 법무장관이 아님)의 밥을 축내며 연명하는 처지임에. 미안(?)한 마음도 쌓이는데... 여의도 1번지의 4년제 계약직 집권당의 모의원께서 민주화유공자는 물론 그 자손들도 혜택을 주어야 한다며 목에 쌍심지를 세우고 계시기에 저는 작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980년 광주, 조선대에 재학 중이던 한 후배는 광주가 혼란스러워 지자마자 고향인 여수로 내려갔다. 그의 집안은 자식을 광주에 유학보내면서 집을 얻어줄 정도의 여수 유지인 집안인데... 광주항쟁(다른이는'사태'라고도 함)이 마무리 돼가는 시점에 조선대 재학중 시민군의 요직으로 참여하다 중상을 입고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 있던 친구를 면회하다가 바로 그곳 중환자 실에서 입원한 그 후배를 만났고 그는 고향 여수에서 심각한 다툼으로 상해를 입고 지극히 사적인 시유로 입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몇해 전, 그 후배가 유공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비난할 셍각은 없다, 그가 당시의 재학증명이나 동아리 활동 등, 여러 증명 서류로 등재 되었다는 후배의 얘기를 들었다. 그가 무슨 경력서류로 신청했고 됐는지는 전혀 모르겠으나 증빙서류만으로 어려우면 관련 주변인의 인우보증만으로도 돼는 유공자이니... 5공화국 전두환정권 말기, 직선제를 외치며 나왔던 젊은이와 넥타이부대들... 적게잡아도 2만이상이고 전국으로 집계하면 20만 이상, 여차저차하여 김영삼의 문민정권이 들어서고 냉전의 상대인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돼고... 소위 ‘운동권’에 명함을 내밀던 이들이 복학이라는 미명으로 학교로 되돌아왔었읍니다. 그럴수 있었던 이유는 각 대학들이 집권정부의 뜻(?)을 받들어 이들에게 과거를 따지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제도와 방편을 마련해 길을 열어주었거든요. 그리고 부가적으로 혜택을 제공해 주었지요, 재입학금면제, 몇학기 등록금 면제 등등 다 국민의 혈세로 메꾸어 졌지요. 당시 적지 않은 이들이 혜택을 누리려 학교로 돌아갈 때, 이미 세월이 흘러 사회에 진출한 더 많은 이들이 '그정도의 혜택을 받을 만큼은 아니다'하며 복학을 안하거니 미루거나 했었지요,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점은 객관적 경력이나 증빙서류가 없는 경우에는 먼저 기득권화한 민주화경력자(?)의 증언과 진술서로도 인우보증을 해주면 돼는 것이었지요. 그럼에도 스스로의 자책과 부끄러움을 가진 많은 이들이 '학생운동 나만 했냐? 그때는 다 그랬지'하며 많은 이들이 그 혜택에서 스스로 멀어져 가기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전통아닌 전통이 '눈먼 돈(자리) 끼리끼리 챙기기'인지라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준비됀 빠른 눈치로, 서류 잘 챙기고 없으면 꾸며서라도 하는 이들이 대접받기 마련인지라... 더구나 '개인정보보호법'의 미명아래 나중에라도 선정 과정 역시 공개되지 않는다면 누가 누구며, 어느놈이 그놈인지 어찌 알겠는가? 이제 2020년, 몇년전, 설겆이 하다말고 뛰쳐 나왔다는 이, 유모차에 어린애 태우고 나온 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노래도 부르고 장단도 맞추며 밤새 몸을 녹이려 쇠주 한잔 하던 이. 노란색 리본으로 휘감아 다닌던 이는 물론 이래저래 오가던 이... 세월이 흘러 30년쯤후 2050년,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100퍼센트 유공자의 국가가 되어지지 않을까??? 하더라도 나는, 나의 자식은 나의 꼬딱지보다 미미한 덕으로 유공자가 돼지는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