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임방이 쓴 <천예록>에는 귀신을 부리는 선비의 관한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중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을 겪고 호조판서와 도원수까지 오른 문신 한준겸 에게는 호남 땅에 사는 먼 친척 하나가 있었다. 그는 매우 가난하여 이따금 한준겸의 집에 찾아오고 했는데, 한준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매번 옷과 음식을 내어 주고 자신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척이 찾아온 뒤 얼마 되지않아 갑자기 다시 떠나야겠다며 한준겸을 찾아와 인사를 했다. 이에 한준겸은 그가 불편해 하는가 싶었는지 더 머물고 가라며 그를 붙잡았다. 그렇게 한준겸의 만류로 친척은 그의 집에 더 머물게 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섣달 그믐날이 되자, 친척이 다시 한준겸을 찾아와 자신이 떠나려 했던 이유를 말했다. "제가 얼마전 급히 떠나려 한 이유는" "귀신 때문입니다" 이에 한준겸이 매우 놀라 물었다. "귀신 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 제게는 귀신을 부리는 재주가 있어 매년 설날 아침마다 귀신을 점호하곤 합니다. 그렇게 통제하지 않으면 그들은 속한 바가 없어 이리저리 다니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데 올해 설에는 여기서 머물게 되었으니 그들을 이 집에서 점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놀라실까 걱정되어 미리 아룁니다." 한준겸은 이같은 괴이한 말에 매우 놀랐으나 곧 그리하라 허락했다. 허락을 받은 한준겸의 친척은 대청에 올라 귀신을 점호할 준비를 했고, 한준겸은 밖에서 이를 들여다 보았다. 잠시후, 귀괴한 형상의 귀신들이 무수히 한준겸의 집에 들어왔다. 귀신들은 한준겸의 친척 앞에서 열을 맞추어 섰고, 그는 명부를 살펴 귀신들을 부르면 점호 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관부에서 검열을 하는 듯 했다. 그렇게 점호가 한창일 때 두 귀신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중 하나는 급하게 담을 넘어 들어왔다. 한준겸의 친척이 그들에게 늦은 까닭을 물으며 추궁했다. "네놈들은 왜 늦게 왔느냐?" 귀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늦게온 귀신은 영남 땅의 한 선비의 집에서 마마를 옮기다 늦은 것이었고, 담을 넘은 귀신은 경기 땅에서 병을 옮기고 있었는데 뒤늦게 점호가 있음을 알고 급하게 오다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두려워 담을 넘어 들어온 것이었다. 한준겸의 친척은 이를 듣고 크게 노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금령을 어기고 병을 퍼트린 죄가 무겁다. 또한 재상 댁의 담까지 넘었으니 그 죄가 더욱 무겁다. 늦은 자는 100대, 담을 넘은 자는 200대를 치고 칼과 족쇄를 채워 옥에 가두거라." 그는 또한 다른 귀신들에게 민간에 재앙을 주지 말것을 다짐시키고는 점호를 마쳤다. 점호가 끝나자, 귀신들은 한참이 걸리도록 한준겸의 친척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는 떼를 지어 집을 떠났다. 이 광경을 본 한준겸은 매우 놀라며 그에게 그러한 재주를 배우게 된 경위를 물었다. 이에 한준겸의 친척은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는 어릴적 한 산사(山寺)를 찾았는데 그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한 노승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그는 노승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음식을 받은 노승이 그에게 말했다. "절 뒤에 있는 골짜기 경치가 좋으니 나와 함께 가보세." 그는 노승의 말을 듣고 그를 따라갔다. 그 곳에 이르니 노승은 품안에서 책 한권을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내겐 재주가 있으나 죽음이 멀지 않아 다른 이에게 이를 전하려 한 지 오래네, 온 나라를 두루 다녔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했는데, 오늘 자네를 보니 내가 찾던 그 사람일세." 그리고는 책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 책에는 귀신을 다루는 법이 나와있고, 그들을 다룰 수 있는 부적과 명부가 들어있네." 노승은 책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여 태웠다. 그러자 삽시간에 수만의 귀신들이 노승 앞에 모였다. 노승은 그들을 일일이 점호 하고는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너희들을 다스릴 것이다." 한준겸의 친척은 그렇게 책을 받은 뒤, 이튿날 노승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노승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 후로 한준겸의 친척은 수십 년간 그 재주를 써 그들을 통솔해 온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한준겸은 매우 기이해하며 물었다. "나도 그런 재주를 배울 수 있겠나?" 이에, 한준겸의 친척이 대답했다. "이는 시골의 궁벽한 자들이나 할 일이지, 나라의 재상되시는 분이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고는 한준겸의 친척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날로 한준겸의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한준겸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가보게 하니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혼자 살며, 불러도 오지 않으려 했고 그 뒤에는 사는 곳으로 옮겨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천예록>에는 이 일이 있은 후 약 20년 뒤에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준겸의 친척이 살았던 것으로 나오는 호남 지방에서 귀신을 쫓으며 유랑하는 한 퇴마 선비의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왜 산속에 숨어 살면서까지 한준겸에게 귀신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지 않으려 한 것일까? ※ 천예록(天倪錄) : 조선후기 문신 임방이 자신이 견문한 이야기를 서술한 야담집(野談輯). ※ 호조판서(戶曹判書) : 現 기획재정부 장관. ※ 도원수(都元帥) : 고려 후기 - 조선 시대의 임시 무관 관직. ※ 마마(媽媽, smallpox) : 천연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