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아들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 "마르코스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인 EDSA 도로에 세워진 '피플 파워' 기념 동상. 28일(현지시간) 오전 수도 마닐라 중심부에서 30분 가량 이동해 도착한 기념 동상 주변 도로는 출근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EDSA 도로는 1986년 2월 시민혁명인 피플 파워가 촉발된 곳으로 현지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당시 고(故)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65년부터 20년 넘게 장기 집권중이었다. 특히 계엄령을 선포해 수천명의 반대파를 고문하거나 살해해 국제사회에서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다. 이에 수백만명의 시민들은 마닐라 부근 EDSA 도로 부근에 모여 독재 타도를 외쳤고 이는 결국 피플 파워로 이어졌다. 결국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굴복해 하와이로 망명한 뒤 3년 후 사망했다. 피플 파워가 발생한 지 36년이 지난 현재 필리핀은 마르코스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들이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하면서 과거 선친의 독재 행적 등을 놓고 논쟁이 일고 있다. 신사회운동(KBL) 소속의 대선 후보인 마르코스(64)는 펄스 아시아가 5월9일로 예정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난 3월 17일부터 21일까지 실시한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56%의 지지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러닝메이트로는 '스트롱맨'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로 라카스-CMD당 소속의 사라 두테르테(43) 다바오 시장이 뛰고 있다. 마르코스 후보의 경쟁자인 자유당 소속의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은 지지율이 24%에 그치고 있다. 인권변호사인 로브레도 후보는 친서민 이미지의 시민운동가로 두테르테 대통령이 펼친 '마약과의 전쟁'을 단호히 반대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도 마닐라의 경우 유권자들의 지지는 '마르코스 대 로브레도'로 양분된다. 도심 곳곳의 벽에는 이들 후보의 선거 홍보 전단지가 붙어있고 광고 게시물을 차량 뒷면에 부착한 버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또 자가용 운전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이 새겨진 스티커를 부착하고 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닐라 시내에서 만난 마르코스 지지자들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퇴진 이후 서민들의 생계가 갈수록 더 곤란해졌다고 불만을 제기하면서 그의 아들에게 기대를 걸어보겠다고 했다. 마닐라 시민인 리오 모란테(33)는 "마르코스 시절에는 발전소 건설, 교육 및 의료 인프라 확대 등의 정책이 시행됐는데 그가 물러난 이후에는 이같은 정책이 거의 중단돼 오히려 생활이 궁핍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수도, 가스, 전기 등의 공공재를 국가가 직접 관리해 저렴한 비용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 코라손 아키노 등 반대파가 정권을 잡은 후로는 해당 산업이 민영화되면서 가격이 올라갔다"면서 "봉봉(마르코스의 애칭)이 선친의 정책을 계승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모란테는 "다른 후보들은 일제히 마르코스를 비난할 뿐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이에 비해 마르코스는 '국가 통합'을 외치고 있어 대통령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오스카 암부스(50)는 "마르코스 시절에는 전기나 수도 비용이 저렴해 살기가 좋았다"면서 "그러나 시민 혁명 후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된 뒤 물가가 상승하고 기업만을 위한 투자가 단행됐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마르코스 일가가 집권 당시 독재를 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정부 재산을 횡령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암부스는 "마르코스는 각료 멤버들과 같이 협의해서 통치했으며 지도자로서 권한을 행사하는건 당연한 일이지 독재가 아니다"라고 했다. 모란테는 "마르코스 일가가 부패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다"면서 "마르코스 가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본거지인 북부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 손꼽히는 재력을 갖추고 있었고 마르코스 전 대통령 자신도 유명한 변호사로 엄청난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르코스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과거 선친의 독재 행적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아들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올해 23세의 전문직 여성인 마틸라 델라 크루즈는 "아버지가 독재자였다는 점이 맘에 안들고 당시 희생자들에게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마르코스를 비난했다. 이어 "마르코스는 오히려 당시 억압 정치가 필리핀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경제 정책도 말로만 일자리와 물가 안정을 외칠 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만일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돼서 아버지의 전철을 따른다면 다시 국민들이 봉기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로브레도를 지지한다는 20대 여성 진 산토스는 "독재 치하를 경험한 아버지는 당시의 암울하고 무서웠던 기억들을 자주 이야기한다"면서 마르코스 반대 이유를 밝혔다. 그는 "지방 의원에서부터 부통령까지 지낸 풍부한 정치 경험과 일자리 창출 및 중소기업들을 위한 탄탄한 정책 때문에 로브레도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면서 "아울러 일반 가정 출신인 로브레도가 대통령이 되면 이른바 지방의 유력 가문 출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정계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도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1458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