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다문화·이주노동자 명절 풍경 추석을 한 주 앞둔 휴일인 지난 4일 오후 1시쯤 각종 전과 튀김이 풍기는 명절의 냄새가 경기도 광주의 ‘함께하는이웃’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함께하는이웃은 형편이 어려운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의 주거·의료 등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다. 이날 사무실은 이주노동자 쉼터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2명과 인근에 사는 필리핀 출신 다문화가정 식구 8명 등이 추석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여 나누는 얘기 소리로 떠들썩했다. 나이지리아와 페루, 필리핀 등 다양한 국적의 이들은 익숙한 듯 나란히 앉아 한국의 명절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동태전을 부치고 맛봤다. 갓 부친 따끈한 전을 하나씩 들어 입에 넣은 이들은 맛있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태전과 채소전 같은 한국의 추석 상차림 메뉴들 사이로 이색적인 음식도 눈에 띄었다. 잡채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얇은 면발을 사용하는 필리핀의 면 요리 ‘판싯’이었다. 필리핀 출신 여성들이 고향의 잔치 음식을 재현했다. 이들은 코로나19 여파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면서 한국에서 최소 3년째 명절을 보내고 있다. 함께하는이웃 사무실에 모여 이렇게 ‘명절 분위기’를 내보는 것도 2019년 가을 이후 3년 만이라고 했다. 그 이전에는 명절 때가 되면 이주노동자 쉼터 거주자들과 주변의 다문화가정 식구들이 모여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위로했지만, 2020년부터 지난 설날까지는 코로나19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가족은커녕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조차 만나지 못한 채 쓸쓸히 명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날 모임을 함께 한 이들의 반가움은 각별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지난달 말에도 서로의 집을 방문해 쌀, 과자, 옷가지 등이 담긴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며 일찌감치 명절 기분을 내기도 했다.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분위기 한편으로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나 고국에 전화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킹 우고추쿠 오비추쿠(47)는 일본에 머물고 있는 고향 친구와 모처럼 영상 통화로 인사를 나눴다. 그는 “나이지리아에 남은 가족들과는 통화가 어려워 대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며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지난 5년 동안 딸을 만나지 못했다. 떠날 때 6살이던 딸은 이제 11살이 됐다”며 그리워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2017년 나이지리아에서 종교 간 갈등에 휘말려 신변에 위험을 겪었다. 이후 도피처를 찾아 한국으로 넘어왔고, 입국 후에는 경기도 파주의 닭고기 공장 등에서 일했다. 그사이 비자는 만료됐다. 현재는 난민 신청을 한 뒤 지난 3월부터 쉼터에서 머물고 있다. 그 옆방에서는 2008년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미라솔(38)이 고국의 조카와 영상 통화를 했다. 23세인 조카는 얼마 전 낳은 아기의 사진을 화면으로 가져와 미라솔에게 보여줬다. 그는 영상 속을 향해 ‘손 하트’를 그렸다. 통화를 마친 뒤 미라솔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가족들을 직접 보진 못해도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니 그나마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고 했다. 페루에서 온 사무엘 플로레스 모랄레스(67)에겐 이번이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다. 1999년 처음 이주노동자로 한국 땅을 밟은 사무엘은 대부분의 시간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보냈다. 신분이 불안정했던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산업 현장에서는 오른손 검지 뼈가 으스러지는 산업재해를 겪었고, 2014년부터는 신장암으로 투병하며 지속적으로 투석 치료를 받았다. 사무엘은 이달 26일 23년 만에 고국 페루로 돌아간다. 지난해 받은 수술의 경과가 좋아 일상적인 거동은 가능하지만, 이전처럼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쉼터에서 8년간 그를 보살펴온 임기본 함께하는교회 목사는 “사무엘은 거동에 어려움이 없고 예전보다 몸도 많이 좋아졌다”며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에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쉼터에서 지내는 여성들은 국제결혼 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집을 나온 경우가 많다. ‘한국서 가수로 일하게 해주겠다’는 꾐에 넘어가 입국한 뒤 술집에서 일하다가 빠져나온 여성도 있다. 쉼터는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다친 이주노동자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며 쉼터를 찾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생겼다. 함께하는이웃은 최근까지 사무실 근처에 또 하나의 5인 규모 여성 이주노동자 쉼터를 운영했지만, 지난달 이곳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하면서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다. 기존 쉼터 구성원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추석 당일에도 쉼터에서 명절 행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방역 당국은 지난 2일 국내 체류 외국인들에 대해 “집단감염의 우려가 있으니 이동과 모임을 최소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임 목사는 “어느 나라든 명절은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정을 나누는 때”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 한국 문화를 그리워하고 향유하듯, 이 사람들도 이런 공동체를 통해 위로를 받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고 말했다.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62751&code=11131100&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