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던 필리핀의 길고 긴 그리고 퍼부었다 하면 도로가 잠기는 장마가 내게는 참 생소한 경험을 하게 하면서 끝이 나고, 밤에는 이불을 덮고 자야하는, 낮 기온이 30도임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필리핀의 건기가 시작되는 2011년 11월의 어느 날. 그날도 활기차게 올티가스의 높은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며, 보람찬 열공을 다짐하며 학원에 도착했는데, 한국에서 많은 초등학생들이 어학연수를 와서 왁자지껄한 시장통을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망했지만 한때 부산에서 거의 각 구 마다 하나씩 가장 많은 학생 수를 보유했던 SJ학원 강사 출신이었던 저는 어법에 강점이 있어서 바기오에서도 필리핀 튜터들이 잘못 가르쳐주는 어법 등을 바로 잡아주었고 또한 다른 어학연수생들의 토익 문법을 가르쳐 주었고, 올티가스 학원에서도 저를 담당하는 튜터들과 어법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원 원장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더니, 마크(담당 튜터)에게 들었다고 하시면서,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셨으니 혹시 학원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어법 및 독해 수업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때땡큐하며, 바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4명 그룹수업으로 6학년 두 팀, 5학년 두 팀, 수업료는 4주 동안 주5일. 하루 한 시간. 일인당 10,000페소. 수익은 5:5, 8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4주에 8만페소, 8주에 16만페소를 벌었습니다. 수업 시작한지 4주가 지나서 맞이한 주말. 1,000페소 지폐 80장이 든 봉투를 아내에게 건네며, 장모님 및 아내의 조카들을 불러 점심은 장가네, 저녁은 북경, 메가몰에 가서 장모님 및 조카들이 필요한 것은 다 사주었습니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아내는 그 때 천페소짜리 지폐 80장을 손에 쥐어본 게 처음이라고 하였고, 내가 아주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하였으며, 장모님을 대하는 저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저랑 결혼해야겠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덩달아 장모님의 눈에도 제가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 사실 별 볼일 없고, 능력도 없이 학원 강사만 했던 내게도 볕들 날이 오더군요, 그것도 필리핀에서. Strike while the iron is hot. 아내가 저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당시 필리핀에 상륙해있던 갤럭스노트1로 콤보 공격을 감행하니, 거짓말을 조금 보태 아내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떡실신을 하였습니다. 아내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기습 뽀뽀를 하기 까지 4개월이 넘게 걸렸습니다. 저는 800페소짜리 필리핀 로컬폰을 사용했지만 내 아내만큼은 아내가 꿈꾸고 그렸던 세상의 풍경을 첨단 기술의 앵글에 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웬걸, 아내는 소매치기나 강도를 당할까봐 손이 떨려 그 폰을 장식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2011년 그해 12월도 유난히 따뜻했던 것 같았습니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맞이한 12월의 크리스마스는 내게 새로운 현상이었고, 여기저기서 쏘아올린 불꽃이 허공에서 다시 8자 격자무늬로 흩어져 필리핀의 어두운 로컬 세상을 밝힐 때 저와 아내는 두 손을 꼭 잡고 하늘을 쳐다보며 저 타오르는 불꽃처럼 남은 인생을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2012년 새해의 붉은 태양은 필리핀 동쪽에서도 어김없이 힘차게 차올랐고 6개월 여정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한국으로 가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머물다 결혼을 하고 아내와 같이 한국으로 오려고 하였으나, 당시에 아내는 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대학원 같은 곳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1년 6개월 과정을 더해야 임용고시를 칠 수 있다고 해서 임용고시를 볼 때쯤, 내가 다시 필리핀에 와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였습니다. 그 1년 6개월 동안 저는 한국에서 터를 잡아야 했고, 아내도 자기 할 일을 해야 했기에 그렇게 약속을 하고 잠시 동안의 떨어짐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학원에서 받은 두 번째 월급인 천페소짜리 지폐 80장이 든 봉투를 건네주면서 먼 곳에서 출퇴근 하지 말고, 올티가스의 내가 머물던 집에서 당분간 편하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하길래, 한국에서는 페소를 취급하지 않아서 필요가 없으니 알아서 쓰라고 했습니다. 눈가에 고인 옅은 눈물을 애써 외면하는 아내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각도가 나오지 않는 어색한 사진도 한 장 찍었습니다. Excellence in flight Korean Air를 타지 못하고, Always delayed fucking Cebu Pacific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도 연착되어 다음날 새벽 3시에 이륙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세부퍼시픽은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