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불던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마치 지난 6개월이 한 편의 대서사시 같았고 다시 내게는 현실이라는 냉혹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매일같이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서로의 안부만을 묻기에 애가 탈 때쯤 다시 한 번 결단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학원에 구직을 하고, 터를 잡는데 1년 6개월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비록 맨땅에 헤딩이지만 필리핀에 가서 아내와 함께 닥치는 대로 살아볼 것인가? 올티가스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8주간 가르치고 나서, 나름 반응이 좋아 그 학원 원장선생님께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은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에 있는 어학원이라는 것이 한국 학생들이 몰려오는 6월~8월 그리고 11~2월 까지가 성수기이고 나머지는 비수기입니다. 성수기 때는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는데 비수기 때는 시쳇말로 손가락을 빨아야 합니다. 밤새 온 몸을 뒤척여 봐도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답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살고 있는 집을 완전히 처분하고 2012년 3월, 36의 나이에 무모한 도전일지 유의미한 도전일지 모르는 긴 여정을 또 시작합니다. 유난히 긴 목을 가지고 있는 아내가 목 빠지게 나를 기다릴 생각을 하니 덩달아 마음이 바빠집니다. 디지털 시대에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은 아내를 위해 노트북 하나, 그리고 잠깐 반짝이다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그 운명을 다해버린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로 준비하고 지구에서 가장 최악이라는 The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에 다시 방문을 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필리핀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무슨 냄새라고 표현하기가 참 애매하지만, 필리핀 거리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인 땅콩, 바나나, 바비큐, 닭내장 등등을 튀길 때 나는 냄새 같았습니다. 팬데믹 이후로 필리핀에 가지 못했지만 아직도 그 특유의 필리핀 냄새를 좋아하고 또 그립습니다. 올티가스 샌안토니오 빌리지 안에, 예전에 살 던 그 집이 아직 비어 있었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주었던 그 8만페소로 아내가 그 집을 다시 계약을 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내와의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침대 매트리스를 받치고 있던 나무들이 자주 부러져 건물의 시설관리인인 꾸야와 내가 서로 좀 많이 민망했다는...... 올티가스라는 작은 도시는 내게 제 2의 고향 같았고, 에스크리바 드라이브에 늘어선 한국 식당들과 마트, 그리고 펄 드라이브 쪽의 한국 식당과, 졸리비, 맥도날드, KFC, 옐로우캡 등의 프랜차이즈, MINISTOP 편의점, 크고 작은 필리핀 스타일의 PUB와 깐띤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고 나를 반겨주고 있었습니다. 센터포인트 빌딩 안에 있는 학원에 찾아가보니 비수기답게 필리핀에서 공부를 하는 소수의 한국 학생들 말고는 썰렁했습니다. 성수기가 다가오는 6월까지 손가락이 남아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 아내를 책임져야한다는 압박, 아무것도 내 스스로 주도할 수 없는 남의 나라 필리핀. 이런 저런 제약들을 몸소 겪어보니, 남의 나라에 사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필리핀의 3월은 얼마나 더운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마음이 초조해지고, 급해지고 그렇다고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기다림을 어쩔 수 없이 강요받았고, 필리핀 사람처럼 기다림의 실행을 해보았습니다. 그 기다림은 어쩌면 필리핀에서 살아야 할 내게 일종의 교훈이 아니었나 싶었고, 사람이 뭔가를 주도적으로 할 수 없다면,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수반이 되는 선택사항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내의 시간을 배워야 필리핀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 4, 5월을 통으로 놀았습니다. 하지만 성수기가 되는 6월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강의할 어법 및 독해자료를 부지런히 만들었습니다. 근처 제본소에 가서 내가 만든 자료를 책으로 펴내서 학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역마살이 끼었다고 해야 할지, 군대를 전역하고 바로 독립을 하여 살았습니다. 새벽에 아내가 출근하면 늦은 아침에 일어나 방청소를 하고 근처 한국마트에서 여러 가지 식자재를 구입하여 반찬을 만들고, 빨래도 하고 그러면서 아내를 기다립니다. 일을 마치고 온 아내는 내가 만든 밥과 반찬을 아주 좋아했고, 젓가락 사용법도 터득했고,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우더니 곧잘 한국스타일의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노트북이 생긴 아내는 해적사이트에 접속하여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곤 하였는데, 집에 인터넷 연결이 어려워서 USB처럼 생긴 것을 노트북에 꽂아서 사용했는데 속도는 얼마나 느려 터졌는지 영화를 보다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버퍼링 표시마저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이 필리핀에 살고 있는 이방인이 아무리 불평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봐야 손해 보는 것은 이방인인데 필리핀에 있는 몇몇 한국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신들이 점령군 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참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