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를 '떠뽀기'로 발음해야" 가짜 원어민 강사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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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명 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하는 김모(27)씨는 얼마전 ‘전화영어 가짜 원어민 강사’ 단속 뉴스에 화들짝 놀랐다. 그도 원어민 행세를 하며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까닭에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발음만 들어서는 진짜와 가짜를 쉽게 구별할 수 없는 전화영어 업체에서는 그나마 신분위장이 쉽다지만. 학생들과 수시로 접촉해야 하는 학원에서는 원어민으로 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전화영어 업체가 단속된 뒤로 더욱 철저하게 원어민으로 위장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삶의 비애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가짜 원어민 강사. 그들의 고충을 들어봤다.

 

◇토종 한국인이 혼혈아로 둔갑

 

원어민 연기를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 강사들은 주로 어렸을 때 미국 등에 나가 살다 와서 발음이 원어민과 흡사하다. 우리 말 구사 능력은 개인따라 다르다. 외국 거주 기간이 길면 서툴고. 짧은 경우 곧잘 한다. 물론 어학원 내에선 한국어를 한마디도 모른척 한다. 가끔 국적을 물을 때면 혼혈아라고 둘러대곤 한다.

 

그럼에도 원어민 행세를 해야하는 이유는 그들에 대한 수요 때문이다. 서울의 유명 어학원 관계자는 “학부모들이 영어를 잘하는 한국 강사보다 영어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 예절까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원어민 강사를 선호해 원어민 강사가 있는 학원에만 아이들을 보낸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떡볶이를 떠뽀기로 발음해야”

 

서울 모 어학원에 있는 강모(29)씨는 식사 시간도 두렵다고 한다. 얼마전 간단하게 한끼 때울 요량으로 어학원 근처 분식집에 갔는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있어 한동안 어찌할줄 몰랐다고.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학생과 눈이 마주치자. 거의 본능적으로 식당주인에게 “떠뽀기”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일부러 발음을 서툴게 한 것이다. 또다른 가짜 원어민 강사는 전자사전을 늘 휴대한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특정 우리말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를 곧잘 묻기때문이다. 단어를 몰라서 전자사전을 뒤적이는 건 아니다. 전자사전으로 한국어를 입력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검색된 단어를 영어로 가르쳐주는 것이다. 한국어를 모른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학원의 또다른 강사는 학생들이 한국어로 단어를 물으면. 그들에게 몸으로 단어를 설명케한 뒤 고민하는 표정 연기를 한 뒤 해당 단어를 영어로 알려준단다.

 

◇투명인간으로 얻은 은밀한 정보 “어찌해야”

 

수도권의 한 어학원 강사 송모(29)씨는 10대 초반의 여학생이 친구들과 한국어로 자신의 성경험을 얘기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송씨는 “학생들이 한국어로 하는 얘기를 가만 들어보면 부모에게 알려야 할 게 정말 많다. 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학생도 있고. 과중한 학업 스트레스로 정신적 불안감 등을 보이는 학생도 있다. 투명인간이 된 덕에 다른 강사들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사적인 고민들을 듣게 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만하다”고 말했다.

 

◇‘파란 눈 선호사상’이 가짜를 양산한다

 

모든 한국인 강사가 원어민 연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가짜 원어민 강사의 비율은 생각 이상이다. 8년 동안 서울의 유명 어학원을 옮겨 다니며 원어민인 것처럼 행세를 했던 송씨는 “보통 서울의 유명 어학원들은 진짜 원어민 강사와 한국인 강사의 비율을 5대1 정도인 것 같다. 하지만 소규모 학원의 경우 가짜 원어민 강사 비율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캐나다에서 총기 살인을 한 뒤 국내에서 강사로 일한 캐나다인이 적발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제대로된 원어민 강사를 구하는 게 상당히 어렵고. 운좋게 좋은 강사를 구했다 해도 유지 비용이 만만치않다. 그들에게 강의료. 보험 및 숙박료. 심지어는 공과금까지 지급해야 한다. 이 까닭에 일부 학원은 한국인 강사에게 원어민 행세를 하라고 강요한다. 국적을 속이면서까지 영업하는 배경엔 학부모의 원어민 선호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