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돌...

 

어찌된 영문인지 한동안 내게는 작업지시만 주어졌다. 채무자를 달러(잡으러) 다니는 일에서 부터, 껄끄러운 원로들(현역에서 은퇴한 조직 선배) 일명 껍데기 벗기기(슈킹치는 일), 상납이 시원찮거나  말을 안듣는 업주가 있으면 아예 그 업소를 문 닫게 하는 일... 조직내에서의 지저분한 작업이란 작업은 거의 다 내게 주어지거나 아니면 그 작업조의 일원으로 차출되곤 했다.

 

느낌으로 충분히 알수 있었다. 대다수의 식구들 모두가 아직은 나를 경원시하고 있다는 걸...심지어는 또래로 인사나눈 친구들까지도 그러했다. 난 굴러들어온 돌이었으므로...

반년 가까이 이어진 작업과 도피생활로 몸도 마음도 조금씩 피폐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난 또다시 교도소 담장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특수 공무집행 방해 및 상해죄... 평소 뻣뻣하게 굴던 업주 하나를 폭행하는 과정에서 후배 한넘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경까지 두들긴 것이다.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나는 내심 사건이 사건인만큼 두바퀴 정도는 예상을 했으나 피해자들과 원만히 합의가 되고 유능한(?)변호사 덕분에 일년 형만 선고 받았다.

 

"정관예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만해도 판사나 검사직을 하다가 옷을 벗으면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 어느 정도의 기간까지는 친분 있는 판,검사들이 그 변호사의 체면을 최대한 살려주는 게 관례 아닌 관례였다. 사회적 이슈가 될만큼 큰 사건이나 사상범들 처럼 민감한 사안이 아닌 이상엔... 우리들은 그걸 두고 정관예우라 말하곤 했다.

 

199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몇일 앞둔 어느 날... 난 춘천 교도소에서 만기 출소를 맞았지만 날 맞으러 와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탄력이 붙는다고나 할까? 한 번 변하기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듯이... 변화하는 시간도 아주 빠르게 단축 되어 가는가보다. 다시 돌아온 바닥은 지난 일년 동안 또다른 모습으로 많이도 변해있었다. 건물도, 가게들도, 업주들도 별반 바뀐건 없었지만 날 대하는 주변 모든 것들이 변해있음을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경기도 광명시 재개발 공사와 대단위 아파트 단지 조성붐으로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의 보스는 그 시류에 적절히 편승하여 수십억의 돈을 거머쥐었고, 더 높은 이상을 달성 하려는 욕망에 조직의 중추들로만 구성된 진골들을 추려서 일산 신도시에 신흥 조직을 만들어 기존의 바닥을 떠나고 없었다. 내가 버려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출소 하는 날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던 이유를...

 

친분이 있었던 몇곳의 업소에 들르니 고생 많았겠다며 업주들이 술에 여자에 푼돈이 담긴 봉투를 들이민다. 어차피 현실이란 냉정하다. 싫어도, 쪽팔려도 인정을 해야한다. 그걸 못하는게 오히려 바보 아닌가!...

 

처음으로 돌아가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업주들로 부터 추렴된 약간의 돈으로 여관의 장기방 두 개를 얻고 그나마 날 믿고 따랐던 후배들 대여섯을 데리고 합숙생활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나마 징역 가기전 작업을 했던 경험들이 간혹 알음알음으로 일감을 물어다 주었다. 악성 채무건들... 사람으로선 도저히 할짓이 아니었지만 당시의 난 서슴없이 맡았다. 나와 내 동생들이 살아야 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일이 들어오는 게 아니므로 육개월여를 가난한 깡패 집단으로 버티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동네를 관리하던 이모라는 일년 선배로부터 급히 보자는 전갈이 왔다. 출소후 몇달이나 난 늘 내처져 있었기에 갑작스런 호출이 좀 찜찜하긴 했지만...그래도 선후배가 아니었던가! 스스로를 위로하고,격려하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카니발이라는 룸나이트를 운영하면서 어느덧 동네의 실직적인 차기로 내정된 그는 원래 허름한 변두리 스텐드빠의 조명기사였다고 한다. 그것도 보조기사... 전의 보스와 동향이라는 명분으로 차출되었고, 언변이 아주 좋아서 누군가가 됐건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타고난 재주를 지닌 자였다.

 

작고 왜소한 체구에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하게 생긴 그를 보면 늘 밥맛이 떨어지곤 했었다. 주둥이로 건달이 된 자였으니...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선배뻘 이기도 했지만 가진자 였으니 말이다.

 

그가 기다리는 룸으로 들어가니 혼자서 양옆에 아가씨를 끼고 앉아 이미 한 잔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찾으셨습니까 형님!" 고개를 숙이자... 앉으란 말도, 아가씨를 물리지도 않은채 한마디를 내뱉는다. "얌마! 너 동네서 따로 식구들 키우는 거야?" "예?" 반문하는 내게 오만한 시선으로 꼬나보면서 그가 다시 말을 뱉는다. "야이 새끼야... 내 바닥에서 왜 내가 모르는 새끼들이 활개를 치는 거냐구? 니가 데리고 있다는 그 개새끼들 뭐야? 양아치 촌놈같은 새끼들 다 죽여버리기 전에 고향가서 그냥 농사나 짓고 살라그래 알았어?"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고 수치심이 온몸에 소름으로 돋아났다. 습관처럼 찰나의 고민에 빠졌다. 이 자리에서 그냥 죽여 버리자니 결과가 뻔히 보이고 여기서 물러서자니 난 호구가 되고마는 것이다. 욱!하고 치밀어오른 살의가 쉽게 가시질 않는다.

 

고민하는 내게 마치 패장의 죽음을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듯 그는 다그쳐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 너까지 디져볼래? 야이 새끼야! 너 그 촌놈들 데리고 나랑 한번 붙어 보자는 거야?" 이빨을 한번 굳게 앙다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에게 대답을 했다.

 

"형님! 제 불찰입니다. 제가 가서 그놈들 동네에 얼굴 기웃거리지않도록 철저히 교육 시키겠습니다..." 

 

정말로 아직은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난 약하고 가진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