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아내...

 

구치소에 수감된 후로도 나의 끝없는 허영심은 멈추질 않았다. 변방의 소두목급으로 인정 받고 싶진 않았었나보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이란 대단하다. 특히나 담장 안에서의 돈의 위력이란 실로 막강하다. 

 

나이 어린 시절 개털로 살던 징역살이를 만회라도 해보려는 듯, 난 여기저기 돈을 풀었다. 좀 웃긴 얘기지만 건달 마눌이로서의 징역 수발 원칙이 있다. 면회는(미결수에 한하여) 매일 1,2회차로(아침 9시전엔 와서 접수를 신청해야 함), 편지는 매일 한통씩!!!,  영치금은 매일 허용되는 한도내에서 맥시멈으로...영치물 역시 허용액의 풀로~ 내가 정해놓은 원칙이다. ㅎㅎ

 

면회할때 툭하면 아는 직원과 함께 면회실로 들어가서 인사를 시킨다. 그리고 아내나 후배들에게 넌지시 손가락으로 표시를 준다. 손가락 두개를 펼쳐보이면 2백을 주라는 얘기고, 세개는 당연히 3백이다. "제대로 해라!"라는 표현은 술에 아가씨에 봉투까지 풀옵션으로 접대하라는 뜻이었고...

 

그런 직원들은 내게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여자빼곤 거의 원하는데로 보답해줬다....

네가지의 죄명이 붙었다. 형사 소송법 제4조1항(조직폭력단체의 수괴), 폭력 교사, 공갈,협박에 인한 금품 갈취, 공문서 변조 및 동행사... 공소장을 받던 날, 눈 앞이 아찔했다. 아무 사건 없이 4조1항만으로도 운 나쁘면 최하 5년 짜리였다. 거기에 내 사건까지도 인정이 된다면 난 여지없이 10년 짜리였다.

 

당시 남부지청에서 강,폭력 사건으론 가장 잘 먹어준다던 변호사를 선임하고도 서울 고등법원 부장 판사 출신의 변호사를 한명 더 선임했다. 후선임은 항소심을 대비해서 미리 정지 작업을 해두려는 의도였다. 어차피 오천이든 일억이든 하루빨리 나가는게 내겐 관건이었기 때문에...

 

1심과 2심 재판을 합쳐서 10개월... 만땅 걸린 길고도 지루한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공문서 변조 및 동행사 건에 관해서만 시인을 하고 나머지 사건에 관해서 모두 무죄를 주장했지만...결국 법정과 변호사의 조율하에 범단건과 폭력 사주건을 제외한 나머지 건이 유죄로 인정, 난 끝내 2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난 감지덕지 했다. 한편으론 여전히 분통이 터졌지만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던 것이다.

 

"사상누각" 모래위에 지은 성이라 했다. 내가 그랬다. 후배들이 찾아와 죽는 소리를 할때마다 업소를 하나씩 이전해 주었다. 어차피 아내가 할수 있는 장사도 아니었기에... 그들의 신의가 그들의 충성이 평생 갈줄 알았다. 설령 아니라해도 난 주었을 것이다. 어차피 나 혼자 힘으론 그것들을 차지할 수도 없었을 테니... 심지어는 미결수 였을 시기, 막걸리 폭력으로 들어와 합의되고 변호사만 있으면 충분히 나갈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합의조차 해결이 안되는 일자무식의 막노동꾼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사십을 넘긴 나이에 오다가다 만난 다방 여종업원과 동거를 시작해서 그 아내가 첫아이 만삭이 된 시기에 사고를 치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 불현듯 임신한 내 아내가 생각 났다. 동생들을 시켜 합의를 봐주도록 하고, 어지간한 변호사도 하나 선임해 주었다. 단! 하루 두시간씩 한글 쓰고, 읽기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조건하에... 

 

결국 그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출소를 했고, 간간히 면회나 삐뚤빼뚤의 받침도 형편없는 편지로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난 그가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맘에 5거리 요지에 포장마차 자리도 하나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몇년 후인가...우연찮게 그 길을 지나는데 그와 그의 아내가 그 자리에서 꿋꿋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 손을 부여잡고 울먹이는 그와 그의 아내... 얼마전 허름한 연립이나마 집도 한채 장만하고 그때 만삭이었던 아이도 딸을 낳아 이쁘게 잘 크고 있다면서 굳이 팔고 있던 햄버거와 토스트를 한아름 싸서 안겨주던 그들... 난 별로 사양치않고 받았다. 맛있게 잘 먹겠노라며...

 

이야기가 좀 흘렀다. 아무튼 가게와 모아두었던 돈들은 내 징역 2년동안 그렇게 보이듯 보이지않듯, 다 빠져 나갔고, 동생들마져 몇몇 덜 약삭빠른 넘들을 제외하곤 하나 둘씩 소식이 끊겨나갔다.

그동안 모았던 약간의 재산이건, 단시간에 모여서 내게 충성을 맹세했던 동생들이건 다들 내겐 사상누각과도 같이 허물어져 갔던 것이다.

 

한결같은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아내였다. 어린 나이에 나를 만나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오직 나만 의지하던 사람... 나 조차도 함께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첫 아이를 낳은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만큼 이쁜 공주님 이었다.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 부모형제들을 그리워했을까?...

 

밤마도 눈앞에 아른거릴 만큼 너무도 보고픈 내딸이었지만, 면회때 데리고 오겠다는 걸 난 굳이 그리 하지 못하게 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볼수없고, 기억하지 못할 나이의 아기였지만 내 아이에게 푸른 수의의 아빠를 보이긴 싫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다른 아빠들처럼 평범하지도 떳떳하지도 못한 아빠의 딸로 태어나게 한것이...

 

부잣집 딸로 불편함없이 귀하게 자라 여리기만 했던 그녀는...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스스로 강해졌다. 간간히 찾아주는 동생들의 도움도 기어코 마다한채 온전히 아내 혼자 힘으로만 나를 수발들면서 딸아이와 생활해 나갔다. 하지만 당시의 난 그걸 알수 없었다. 아내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출소 후 아내의 학교 친구,후배들을 통해서 들은 얘기로는 아내는 당시 아이와 생활하기 위해서 친구들의 화실에서 알바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거나 심지어는 대학로에서 데생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비를 벌기도 햇다고 한다. 너무도 고맙고 존경스런 내 아내...

 

우물안 개구리 세상 넓은 줄 모른채 싸가지없이 활개치다가 들어간 2년의 징역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광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를 했다. 정문을 나서자 저만치서 후배 두어놈과 내 아내가 희미한 새벽 여명을 뚫고 달려오는게 보였다.

 

와락! 품에 안긴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콧물을 훌쩍 거리면서 종알대는 걸 들으며 난 박장대소로 답해줬다.

 

"오빠! 그 안에서 나쁜 넘들이 오빠 때리고 글진 않았어?"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기 남편이야말로 꽤나 나쁜넘축에 속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