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인종 차별과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단상(斷想)
먼저 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2~3일 시골에서 생활합니다. 햇수로 15년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온가족이 함께 토요일 오후 출발해 시골에서 주말과 주일을 보냈지만, 막내가 대학 진학을 앞둔 상태라 아내가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금요일 오후부터 저 혼자 시골집에 가서 생활하다가 일요일 오후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주말이면 항상 머무는 곳은 남쪽으로는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서쪽과 동쪽으로는 드넓은 들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언덕 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넓지 않은 규모의 땅을 구입해서 집을 짓고 별채 겸 작업실도 만들고 정자도 지어 놓고, 정원을 가꾸고 각종 유실수와 야생화, 텃밭도 가꾸다가 시골 생활에 조금 적응하면서 땅을 늘려 약간 풍성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농사는 못 짓고 있습니다. 그냥 철따라 열리는 매실, 오디, 앵두, 살구, 자두, 복분자, 무화과, 감, 배, 석류, 대추 등 각종 과일이나 열매 그리고 마늘, 양파, 상추, 양상추, 고추, 호박, 옥수수, 시금치, 부추, 배추, 무, 대파, 쪽파, 오이, 가지, 머위, 아욱, 도라지, 더덕, 케일, 깻잎, 두릅순 등 비료나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수 퇴비만으로 재배한 여러 채소를 수확해서 저희 가족뿐만 아니라 지인들과 나누어 먹습니다. 돈은 받지 않습니다. 그저 나누면서 삽니다. 받는 사람들이 좋아하면 나누어주는 저희들은 즐겁습니다. 대신 수확량이 적은 참외와 토마토 등의 작물은 오롯이 저희들 몫입니다. 단지 좋은 날을 정해 1박2일로 부부 함께 모여 삽질 좀 하다가 아이들 이야기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도타운 정을 쌓습니다.
시골 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도시에서 자란 제 아이들에게 꽃과 나무, 강아지와 하나가 돼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게 하고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경쟁이란 삭막한 분위기로 잃어버릴 수 있는 소중한 정서를 함양케 할 목적이었습니다. 추억도 함께 말입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무렵, 생일 파티는 꼭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을, 아이 부모님의 허락 하에 초청해서 시골에서 치렀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가마솥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우면서 폭죽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잠 잘 때는 아이들을 한 방에 모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시골집에서 차로 20분 걸리는 부곡하와이로 데려가 목욕도 함께 하게 하고 몇 가지 놀이시설을 이용해 놀게 했습니다. 지금도 제 아이들과 아이 친구들은 그 추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출가시킨 다음 노후에 저와 아내가 완전히 시골에 정착해 수확한 농산물로 김장김치를 담그며 간장과 된장, 고추장 등도 직접 만들고 또한 장차 태어날 손주들을 돌보며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시골 생활은 전혀 체험하지 못했고, 다만 좋아하는 사람들의 글을 통해 시골 생활에 대한 간접 경험만 접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시골 생활을 처음 할 당시 각종 채소의 파종은 어떻게 하고 퇴비는 언제 뿌리며 잡초는 어떻게 제거하는지를 하나도 몰랐던, 한 마디로 농사의 ‘농’자도 몰랐던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타향 출신의 저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움을 주시는 시골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 한 분은 오래 전 남편을 여의고 장성한 아들 둘, 딸 하나를 모두 도시로 출가시킨 후 혼자 사시는 할머니입니다. 큰아들은 결혼 후 살림을 농촌이 아닌, 근교의 도시에서 생활하며 아들 한 명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홀로 외롭게 사시는 어머니와 함께 농촌에서 생활하고 싶어했지만, 큰 며느리는 시골이 싫다며 도시 생활만을 고집했습니다. 그 문제로 부부 사이 다툼도 많았습니다. 결국 큰아들은 단신으로 어머니 집에 와서 농사를 짓고, 큰 며느리는 도시에서 아들을 키우며 따로 생활했습니다. 사실상 별거였지요. 그러던 와중에 큰 며느리가 주변 남성과 바람이 났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10여 년 전 일입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큰아들과 손자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아들을 재혼시키려고 했습니다. 이혼한 아들 역시 재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아들 딸린 이혼남과, 그것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혼남과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없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 물을 먹은 여자들도 시골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도시에서 자란 여자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시골에서 사는 게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농촌의 현실이고 농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사실 시골에서는 조금만 부지런해도 먹는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에서 살려고 하는 여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할머니는 저와 제 아내에게 큰아들 재혼 상대자를 좀 물색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몇 군데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도회지의 어느 여자가, 아들 딸리고 농촌에서 농사짓는 이혼남과 선뜻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할머니의 품성이 어질고 순한 데다, 아들 역시 법 없이 살 정도로 착하며 성실한 사람이라고 맞선 한 번 볼 것을 주위 사람에게 권유했지만, 권유한 우리만 졸지에 욕을 들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아닌 흠 있는 남자에게 맞선 볼 것을 권유했다고요. 끝내 할머니와 큰아들은 한국여자와의 재혼을 접었습니다. 그러다 2년 전, 40대 후반의 큰아들은 재혼했습니다. 그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저 역시 지난해 말, 뒤늦게 알았습니다. 상대가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외국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손자는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다 얼마 전 군에 입대하고 큰아들은 어머니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벼농사를, 가을부터 봄까지는 비닐하우스로 딸기와 수박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재혼한 외국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둘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의 장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생활하는 마을에는 우리나라 농촌이 그렇듯이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농촌에서는 삶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도시로 나가 삽니다. 시골에서는 40대, 50대도 젊은 축에 속합니다. 따라서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60대 후반입니다. 노부부가 함께 사는 경우도 있지만, 독거노인들도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드뭅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주변에 초등학교가 몇 군데 있었지만, 그간 신입생이 없어 대부분 폐교되고 읍사무소가 있는 초등학교 한 곳에 폐교로 갈 곳 없는 재학생들을 모았습니다. 이 학교에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몇 명 다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나이가 든 데다 노동을 하거나 농사를 짓더라도 주로 소작을 하면서 근근이 살다 보니, 아이들의 이모조모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엄마인 이주 여성이 아이들 학교 문제나 학력 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없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머무는 시골의 이주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경제적으로 열악한 남자와 삽니다. 남자의 경우 초혼도 있지만, 재혼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 남자는 여자 집에 돈을 지불하고 중간 브로커에게도 돈을 지불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위 매매혼입니다. 빠듯한 살림에 빚으로 얻은 돈까지 지불하다 보니 결혼 후 경제적으로 더 힘듭니다. 삶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주 여성 또한 남편과 함께 일을 해야 살림을 꾸려 갈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 학교 다니는 것이나 공부 문제는 아이들에게 맡길 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심지어 부부간, 고부간 언어의 장벽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당연히 그 영향은 아이들이 받습니다. 같은 학년의 또래 아이들보다 언어 구사력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교사의 수업은 아주 빠르게 전개됩니다. 교사의 설명도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알아듣기에는 벅찹니다. 점점 아이들은 수업에 낙오가 됩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학교에서 재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학력도 떨어집니다. 특히 수학에서 더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 교육제도에서 수학의 기초가 부족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은 계속 추락합니다. 이과든 문과든 교과목의 중심은 수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학은 단시일 내 해결할 수 있는 과목이 아닙니다. 그리고 혼자 공부할 수 있는 쉬운 과목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수준은 그 어떤 나라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습니다. 한 예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수학 공부를 하거나 수학 시험을 치를 때 전자계산기나 공학계산기 사용을 당연시합니다. 필리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예 금지합니다. 계산기를 사용하면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복잡한 계산이든 단순한 계산이든 머리와 손으로 계산해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워낙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 실수 하나로 순위가 바뀝니다. 당락이 결정됩니다. 실수를 줄이는 것도 교육의 일환으로 여깁니다. 또한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학의 난이도는 커지고 공부해야 할 내용도 늘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은 사교육 시장에서 절대 왕좌를 놓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수학의 기초를 놓치게 되면 중학교에서 만회하기 어렵고, 기초가 부족한 상태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더라도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이런 현실에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고 점점 학교 가는 게 싫어집니다. 하지만 중학교까지는 초등학교 성적이야 어떻든 진학합니다. 의무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운 좋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성적이 바닥권이어서 내로라 하는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니 지방의 국립대학도 갈 수 없습니다. 2년제 대학이나 이름 없는 대학에 가겠지요. 그것도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2년제 대학이나 4년제 대학의 경우 학비가 장난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미래는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2년제든 4년제든 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왜냐 하면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아닌,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소위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아이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실업자로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이름 꽤나 알려진 회사의 경우 입사 원서를 제출할 기회마저 박탈하는 게 현재 한국의 실정입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입사 경쟁률이 보통 몇 백 대 1을 기록합니다. CJ그룹이나 삼성그룹, 현대그룹 등 모든 재벌 기업은 1차 서류 전형을 통해 거른 지원자를 대상으로 2차 인성 및 적성 검사를 치르고 여기에서 걸러진 지원자에게 최종 면접시험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가 어떤 사람이고 부모의 학력은 어느 정도인지, 가족 관계는 어떤지, 심지어 이랜드그룹의 경우는 교회에 다닌다면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지 등 세세한 사항까지도 파악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취직할 곳은 단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부 중소기업을 제외하고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차별이 보편화된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요? 일단 ‘정상적인 생활’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봅시다. 한국에서의 정상적인 생활이라면 우선 대학까지 나오고 남들이 선호하는 직장이든 그렇지 않은 직장이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도 장만하며, 아이의 육아 문제부터 교육 문제까지 뒷바라지를 하면서 출가시킨 다음 노후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다가 가진 것도, 갖춘 것도 모자란 상태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한국인 부모들이 그런 처지의 사람을 사위나 며느리로 받아들이려고 할까요?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국인들은 백인에 대한 동경은 있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인이라도 흑인은 또 싫어합니다. 인종 가운데 백인종만 선호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순위를 매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인의 민족성입니다. 본인과 부모를 묶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학벌을 따지거나, 장래성이 있는지 없는지 직업을 따지거나, 경상도냐 전라도냐 출신 지역을 따지거나, 화목한 집안인지 그렇지 않은 집안인지, 양부모가 계시는지 부모가 이혼했는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등 집안과 재력도 따집니다. 또한 한국인은 체면과 인맥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틀 전, 동남아 출신의 한 유학생이 6년 동안의 한국 유학 생활 중 특히 한국인의 인종 차별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힌 글을 읽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가 회계사이고 어머니가 교사로서, 그 나라에선 상류층에 속합니다. 8남매 가운데 공부를 못하는 막내만 부모와 함께 살고 있고, 본인을 포함한 나머지 형제들은 오스트레일리아 · 태국 등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외국 기업에 다니거나 박사 과정 등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국에서 한국 정부가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몇 백 대 1의 경쟁률을 뚫으며 유학생으로 선발된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영어도 잘합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고 있는 한국 대학생들은 이 친구를 투명 인간 취급을 한답니다. 한국 대학생들이 그에게 “영어는 할 줄 알아?”라고 물었을 때, “저 영어 잘해요”라고 대꾸하면 “그건 미국식 영어가 아니잖아”라고 무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MT나 과별 모임에서도 소외시킨다고 합니다. 간혹 한국 대학생들이 “인터넷 알아?”, “스마트폰 써?” 라고 물으면서 미개인 취급할 뿐, 아프리카나 동남아·중국·이슬람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과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종 차별이지요. 또한 그는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벽보를 붙인 적이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찾아간 학생들의 집에서 “미국인이 아니네요?”, “동남아 사람이네요?”라고 그냥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는 아프리카 친구들과 지하철을 타서 크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이 껌둥이들아, 조용히 해. 떠들려면 너네 나라로 가서 떠들어”라는 말에 옆 칸으로 옮겨 타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외국인 대상 아르바이트를 모집하는 광고의 대부분이 백인들 위주로 채용하는 등 한국인들의 백인 선호 행태를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그는 자신과 함께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친구들-아프리카 · 중동 · 중국 · 동남아 출신들-상당수가 자기들 나라에서 상류층에 해당하고, 교양 수준도 한국 학생들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인종 차별을 당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이처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한국인의 민족성이 바뀌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민족성이 하루아침에 바뀌겠습니까? 일부에서는 제도를 바꾸면 된다고 하지만,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결혼할 때가 되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거나 생각지도 못할 어려운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부모들처럼 외국인과 결혼할 수 있겠지요. 물론 다문화 가정의 자녀 가운데 아들의 경우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딸이라면 또 문제가 달라집니다.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차별받는 한국에서 살게 할지, 아니면 차별을 두지 않는 외국에서 살게 할지를.
제 생각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 글로 상처받으신 분이 계시다면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제가 왜 필고 회원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올 초부터 글을 올리고 답변을 쓰게 되었는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둘째아이를 필리핀으로 보내 현재까지 5년 동안 공부시키고 대학에 다니게 하면서 겪었던 가디언 문제, 어학원 문제, 튜터 문제, 통학 문제, 교통 문제, 하숙 및 하숙집 주인장 문제, 식사 문제, 학교 진학 문제, 대학 전공 문제, 학점 문제, 진급 문제, 아이 건강 문제, 교회 문제, 돈 문제, 치안 문제, SSP 연장 문제, 학생비자 및 아이카드와 ECC 발급 문제, 출국과 입국 문제, EMS 항공 택배 문제 그리고 다니던 대학을 졸업시킨 후 제3국의 대학원으로 보낼지 아니면 3학년을 수료케 한 후 다른 나라 대학으로 보내는 게 좋을는지 그렇다면 토플은 어떻게 공부하고 IELTS는 어떻게 해야 할는지 등 아주 소소한 것에서부터 나름 큰 것까지 여러 문제와 맞닥뜨리며 숱한 갈등과 번민·불안·두려움·기쁨 심지어 분노까지, 그리고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기도하고 울기도 하면서, 그러는 가운데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당한 일도 있었지만, 필카페24와 필고 등 여러 사이트를 통해 습득한 귀중한 정보와 고마우신 분의 도움으로 급박하게 해결하거나 정신적으로 훌훌 털어내면서, 제가 받았던 그 고마운 도움을, 비록 턱 없이 부족하고 알량한 지식이지만 그동안 쌓았던 것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되돌려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AI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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