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만들기...


게임에 승리한지 몇일 후인가...난 친구녀석의 소개로 나보다 3년위의 선배에게 인사를 드렸다. 본래 영등포 계열의 식구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사업쪽으로 눈을 돌려 어느정도 성공을 이뤘다는 말을 들었지만, 난 첫인상 부터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이름이 장무기 라는데 보나마나 별명이리라... "무협지꽤나 좋아하는가 보다." 속으로 좀 웃었던 것 같다. 알고보니 당연하게도 별명이었다.


건달에게선 알게 모르게 풍기는 뉘앙스가 있다. 얼굴이 아무리 험상궂게 생기거나, 체격이 좋아서 건들건들 거린다 해도 양아는 말 그대로 양아만의 냄새가 나는 법이고, 아무리 티를 안내고 자신을 갈무리 한대도 건달에게선 웬지모를 느낌이란게 온다. 이 양반이 그랬다. 자신이 건달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로렉스 콤비에 알마니 슈트를 걸치고 테스토니 수제화를 신고 있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목엔 누런 개줄에 팔찌까지 차고, 손에 든 듀퐁 라이타를 (여기서 속으로 한참을 웃었던 거 같다. 듀퐁은 듀퐁인데 호마이카였다) 끊임없이 자랑스레 만지작거리던 그... 느닷없이 삼류 양아치 영화의 악덕 일수쟁이가 떠올랐다. ㅎㅎ


하지만 추진하려는 사업에서의 브리핑을 들으면서 사업적인 그의 마인드만큼은 높이 사주고싶었다. 간간히 피력하는 장래의 포부도 당찼고...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내가 가고싶었던, 하지만 전혀 문외한인 그 세계로의 입성에 그는 참으로 박식했고 그 방면으로 아는 인맥들도 많았다.


또 한가지 내게 너무도 절실했던 건... 하루빨리 떳떳하면서 당당한 내 기반을 다져서 아내와 딸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목표였다. 96년의 상반기를 난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투자는 그 선배가 40%, 내가 60%...친구는 가게가 처분 되는데로 합류키로 했다. 송파구 신천동에 사무실과 연습실을 임대하고 밴과, 승용차를 각각 뽑고, 직원들 채용에 명함까지 일일히... 한달이 훌쩍 지나갈 무렵, 마치 꿈결처럼 아내가 나를 찾아왔다. 딸아이를 안고서... 둘이서 아이를 부등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아이대로 영문도 모른체 지엄마와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울어대고... 

 

그동안 처갓집에서 아이만 데리고나와 화실을 하던 친구집에 얹혀 지내면서 알바로 생활을 해왔다고 했다. 같이 살던 오피스텔로 가보니 이미 처분한 후였고, 그때부터 홍대쪽과 가리봉동을 오가면서 평소 면이 있던 내후배나 친구들을 찾아헤매기 시작했고, 한동안이 지나서야 우연히 길을 지나던 후배 한넘이 아내를 발견하고 인사차 차에서 내린 길에 우리의 당시 상황을 알게됐던 것이다.


약속을 해주었다. 다신 비겁하게 아내와 아이를 따로 두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는 길을 걷지도 않겠다고...


얼마 후 구색이 거의 갖춰졌을 무렵 공개 오디션을 실시했고, 구름처럼 몰려든 스타지망생들 가운데 천이백대 일 꼴로 4명의 남녀 혼성댄스 그룹을 스타트 시켰다. 당시 일신 여상 3학년이던 채원이, 멤버 중 유일한 여자 아이였고 나머진 랩퍼 둘에 지금은 고인이 된 x성이가 막내로 팀의 리드 보컬이었다.


아직 뜨지않은 지망생들이 다 그렇듯, 아이들은 육개월이 넘도록 정말 고생들을 많이 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도 들르지못하고 바로 사무실로 출근해서 밤 열시가 넘도록 연습에 연습을 강행군했다. 통장의 잔고는 계속 줄어들고, 누구라 할것없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속에서도 난 아이들만 보면 절로 마음이 뿌듯하곤 했다. "저놈들은 내 자랑스런 원석들이다. 내가 연마하고 다듬어서 반드시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재탄생 시키고야 말테다!" 작곡가와 작사가들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 선배와 트러블이 생겼다. 당시 이름꽤나 날리는 작곡가들로 부터 한곡 받는데 7,8백... 때론 몇몇 톱에게선 천여만원도 푼돈이었다. 작사가 역시 일급 에게선 4,5백이 족히 나갔고... 

 

근데 이 선배란 양반이 그 돈을 아끼는 것이었다. 몇일을 서로 대립한 끝에 난 결국 내 성질을 못이기고 그 선배와 결별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선배가 투자금의 일부를 회수하고 빠져버리는 시점부터 난항은 거듭됐다. 사무실의 보증금이 밀리고, 타고다니던 차로 일명 <차차차> 대출을 받는가 하면... 그나마 부동산 선배의 보조가 없었더라면 아이들은 데뷔조차 하지 못할뻔 했다. 

 

급조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내가 들어봐도 흔하디흔한 멜로디에 유치하기 짝이없는 노랫말... 하룻밤에 수백의 접대를 해줘야만 다음날 스포츠 신문 연예란에 박스 기사 한토막 정도나 실어주고, 라디오 음악프로에 한두번 내아이들 노래가 나왔을까?... 간혹 케이블 방송에서 불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일단 데뷔는 시켰지만 지명도에서 많이 떨어졌던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띄우는 길은 꾸준한 방송 출연이었다. 

 

결국 인맥도 별로 없던 나는 접대가 유일한 방법이었고, 끝도 없는 접대비를 위해 빚을 내가면서까지 사무실 근처의 업소 하나를 인수하게 됐다. ski 라는 단란주점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사무실을 잘못만나 커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됐고, 난 나대로 빚더미에 올라 앉을 수 밖엔 없게됐다.


역시 세상은 여전히 만만치를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난 꾸준히 처갓집엘 인사 다녔다. 처음엔 문전박대도 그런 문전박대가 없더니 내 명함을 올리면서 진솔하게 앞으로의 포부를 말씀드렸고, 다신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드린 결과 처가식구들은 조금씩 나를 달리 바라봐주기 시작했다. 그토록 완고하셨던 장모님께서 추석날 아내 손에 들려 보내드린 더덕셋트를 보시면서 "더덕은 수입산이 아니구만...양념구이 하면 맛있겠다."라고 말씀하시더란 걸 들으면서 마음 한켠이 얼마나 푸근해지던지... 

 

사업말고는 걱정할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기획사를 닫게 되었다. 사무실의 집기등을 빼내던 날... 직원들과 아이들은 울면서 나를 위로했지만 난 그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조아려 사과를 했다. 한명 한명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난 그들에게 정말로 번듯하고 기반있는 기획사나 매니지먼트를 찾아가서 꼭 스타가 되어달라 부탁도 했다. 당분간 난 단란주점 운영에만 바짝 신경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후, 몇년 후인가 교도소 안에서 음악 관련 잡지를 보는데... 낮익은 아이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x성이 녀석이었다. 팔십년대 후반, 남성 댄스그룹으로 인기를 끌었던 멤버들이 차린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 거기서 남성 댄스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였다. 얼마지나지않아 중국으로 진출하더니 한류 열풍의 주역들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내 일은 아니었지만 난 참으로 흐뭇했었다. 그러나 불과 일년여 후인가? 아내로부터 뜻하지 않은 편지 한통을 받게 된다. "오빠! 그곳에선 뉴스 볼수 있어? 오늘 새벽에 x성이 하늘 나라 갔어. 나도 TV보고야 알았어." 부랴부랴 몇일 전의 스포츠 신문들을 찾아 훓었다. 연예란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원인모를 바이러스성 감기로 사망!!!"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2000 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고1의 여리디 여린 나이로 밤 늦게까지 연습실서 구슬땀을 흘리며 댄스연습에 열중하던 녀석이 떠올랐다.

 

달리 아무것도 해줄게 없었다.

 

난 그저 속으로만 "우리 x성이 좋은데 가게 해주세요. 부디 좋은데 보내주세요." 염원을 드렸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