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제목 : 상한 잎새로도 아름답다

녹음 : 정기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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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필리핀에 산 지 13년차입니다. 한국 사는 사람들도 가 봤다고 하고, 필리핀에 온 지 얼마 안되는 분들도 가 봤다고 하는데 아직 못 가본 곳이 몇 곳 있습니다. 보라카이, 민도로, 그리고 히든 벨리입니다.

드디어 얼마 전 히든 벨리를 다녀 왔습니다. 숨겨진 계곡... 마닐라에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온천 이름입니다.

입장료가 워낙 비싸서 엄두를 못냈었더랬는데, 손님이 오신 통에 출혈을 감수했죠.

길고 좁은 길을 따라 몇 십분을 들어가는데 값을 하겠지 하는 기대와 가는 길의 허접함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더군요.

드디어 도착해서 입장권을 끊고 히든 밸리로 들어가는데

아 ......... 정말 좋더군요.

조용한 분위기에 자연과 어우러진 시설들, 그리고 선녀들의 놀이터를 연상케 하는 온천....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다시는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렌즈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근사한 풍경을 놓칠리 없지요.

50미리 단렌즈는 전경을 담기에는 화각이 좁습니다. 그래서 인물 사진이나 대상을 근접해서 찍기에 적합합니다.

사진을 찍으면 저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 나와서 찍을 때마다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진기를 들고 산책로를 따라 폭포에까지 올라가 보았습니다.

근사한 풍경 속에 있는 이파리, 꽃, 나무 등등을 잡으려고 다가 갔는데

의외로 영 찍을 게 없는 겁니다.

이파리는 흠없이 깨끗한 것이 별로 없고

꽃도 찍사를 유혹할 만큼 환상적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폭포에 올라가면서 별로 찍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 정도를 담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몇 달 전에 남아공에 갔을 때 생각이 났습니다.

남아공 사람들은 가든을 가꾸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필리핀의 졸리비 만큼 꽃과 가든 용품을 파는 곳이 많더군요.

꽃 가게가 웬만한 대형 몰만큼이나 컸습니다.

꽃이 얼마나 많은지... 형형 색색의 각종 꽃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신났죠. 한 30분 정도 있는 동안 300장은 족히 찍었던 것 같습니다.

심도를 달리 해 가면서 이렇게도 찍어 보고, 저렇게도 찍어 보고

찍은 사진은 모두가 예술이었습니다. 꽃들도 잎들도 완벽했거든요.

 

그런데 그토록 아름다운 히든벨리에서 찍을 사진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

자연과 인공의 차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아공의 꽃 시장은 잘 보호된 환경에서 필요한 농약과 비료를 주어서 완벽하게 키웠다면

히든벨리는 조경에 신경쓰고 잡초는 뽑았겠지만 그래도 자연이었던 거죠.

온천에 농약은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벌레도 많고 태양을 가리기에는 너무 넓고 ....

그래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꽃 시장의 완벽한 꽃과 자연의 흠있는 꽃 중에 무엇이 의미가 있겠나?

좀 못나도 자연의 꽃이지 싶었습니다.

완벽한 하나 하나는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어우러져 전체적인 풍경은 환상이었다면

꽃 시장은 하나 하나는 완벽하게 키웠지만 전체적인 조화가 없기에 또 하나의 슈퍼마켓 정도 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것은 아니죠.

한인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이런 저런 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서로 받아 주고 조화를 이루며 사랑하며 산다면

이 또한 히든 벨리와 같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폭포에서 그런 생각을 한참 하다가 내려 오는 길에 사진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을 찾기보다 ..... 흠이 있어도 생명력을 지닌 것들을 담았습니다.

마치 자화상을 그린 것처럼 사랑스럽더군요.

그리고 흠 있는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보면서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숲이고

당신과 더불어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하는 말을 중얼 거려 보았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정기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