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기사라 퍼왔습니다...
주간조선 기사인데요 최근 필-중간의 영토분쟁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어 여러분들께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필리핀의 딜레마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150㎞ 떨어진 수빅만(湾). 우리나라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있어 잘 알려진 수빅만에는 1992년까지 미 해군이 주둔했다. 미 해군의 해외 최대 보급기지 역할을 한 수빅만을 배후 기지로 미군은 베트남전쟁을 치러냈다. 수빅만의 미 해군 제7함대 기지는 한국전쟁 때도 미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수빅만 미 해군기지는 1991년 필리핀 의회에서 미군 주둔협정 연장 법안이 부결되면서 이듬해 문을 닫았다. 지금은 방갈로를 갖춘 휴양 리조트와 골프장이 들어서 한가롭기 그지없는 곳으로 변모했다.
마닐라 북서쪽으로 60㎞, 수빅만 동북쪽으로 4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클라크국제공항 역시 1991년까지 미 공군기지로 사용됐다. 미국이 1903년 조성한 비행장으로, 태평양전쟁 때만 해도 활주로를 두고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인 전장(戰場)이었다.
미군의 필리핀 주둔 시절 수빅만해군기지와 클라크공군기지의 활주로를 이륙한 F-4, A-1, A-4 등 미군 전폭기들은 수빅만 서쪽으로 126해리(1해리는 약 1.8㎞) 떨어진 한 무인도로 날아가 사격 훈련을 하고 복귀하곤 했다. 이 사격 훈련은 1950년대 초반부터 1992년까지 계속됐다. 바로 이 무인도가 요즘 필리핀과 중국과의 대치 상황을 불러온 ‘스카보러섬(Scarborough Shoal·필리핀명 파나타그)’이다. 중국이 황옌다오(黃巖島), 대만은 민주초(民主礁)로 부르는 곳이다.
스카보러섬은 남중국해 중사군도(中沙群島, 영문명 메이클즈필드 제도) 동쪽이고, 필리핀의 서해에 있다.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는 500해리, 필리핀 수빅만에서는 126해리 떨어져 있다. ‘섬(島)’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대부분은 해면 아래 잠겨 있다. 해면 위로 0.5~3m가량 암초가 삼각형 형태로 삐죽하게 솟아 있는 정도다. 스카보러섬에서 제법 큰 암초라고 해봤자 수면 위 1.8m 높이이고 넓이는 3㎡(약 1평)가량이다. 삼각형 형태의 암초군 가운데는 수심 10~20m 정도의 호수가 형성돼 있어 중소형 어선들도 드나들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항공모함처럼 보이는 이 섬 일대는 사격 훈련을 하기에 그만이다. 베트남전쟁을 전후해 수빅만해군기지와 클라크공군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전투기들의 사격훈련 표적지가 됐다. 우리나라 전북 군산 앞바다 서쪽 63㎞ 해상에 있는 무인도 직도를 미군이 사격 표적으로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
수빅만해군기지와 그 배후의 클라크공군기지는 1992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눈엣가시였다. 미 해군 7함대 등 필리핀 주둔 미군의 핵심 전력이 포진한 두 기지는 중국과 베트남 등 공산권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스카보러섬 인근 해역도 미군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을 때는 중국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미군의 사격 연습으로 작렬하는 포탄 때문에 베트남 앞바다까지 물고기를 잡으러 내려가던 중국 어민들도 스카보러섬 주변 해역에는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20년 만에 미군 철수 대가 치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2년 11월 24일, 미 해군 제7함대가 수빅만에서 성조기를 내리고 전면 철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51년부터 1992년까지 42년간 스카보러섬을 실효 지배해 온 미군이 떠나자 이 섬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최근 중국이 역사적인 연고권을 들먹이며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중국 어선들이 섬 인근에 출몰하는 것도 힘의 공백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선이다. 미국을 내보낸 것이 결과적으로 중국을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독수리(미국)가 물러나자 대신 용(중국)이 들어왔다” “필리핀이 20년 만에 미군 철수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현재 필리핀과 중국은 스카보러섬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촉즉발 상태로 치닫고 있다. “중국과 필리핀 간에 전면전이 임박했다”는 소문도 나돈다. 필리핀 측은 스카보러섬에 대해 “필리핀 주둔 미군이 사용했던 곳인 만큼 미군이 떠난 지금 필리핀에 영유권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는 입장이다. 기세등등한 중국은 과거 미국이 이 섬을 사격장으로 사용한 것조차 소급해 문제를 제기할 태세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과거 미국이 중국의 허가 없이 중국 영토(황옌다오)를 사격장으로 사용한 것 자체가 완전히 불법”이라며 “불법행위는 권리 자체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법적인 기본 순리”라고 지적했다.
중국이 이처럼 기세등등하게 나오는 데는 최근 몇 년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여온 필리핀의 ‘줄타기 외교’도 한몫했다. 1951년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필리핀과 미국과의 관계는 2004년 불거진 ‘안젤로 드 라 크루즈’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악화됐다. 안젤로 드라 크루즈는 이라크에서 근무하다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필리핀인 트럭 운전사. 당시 이라크 무장단체는 “미국의 요구에 의해 파병한 필리핀이 이라크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으면 트럭 운전사를 참수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필리핀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 철수 결정을 내렸고, 이는 미국의 분노를 불러왔다.
이 사건 이후 중국은 미국과 필리핀의 틈새를 비집고 대규모 경제 교역을 바탕으로 필리핀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98년 20억달러에 불과했던 중국과 필리핀 간 교역 규모는 2007년 300억달러, 2011년에는 322억달러로 급증했다. 현재 중국은 필리핀의 세 번째 교역국이고 일곱 번째 투자국이다. 2005년 4월 마닐라를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향후 5년 내 양국 교역 규모가 두 배로 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후 주석은 “중국이 돈을 댄 루손섬 북부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양국의 새로운 우호 관계와 협력의 상징”이라고 선언했다.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은 군사적인 분야로까지 확대됐다. 2004년 7월 이라크에서의 철군 결정 이후 아로요 대통령은 베이징을 국빈 방문했다. 당시 아로요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워싱턴 압박 카드’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당시 원자바오 총리와의 회견에서 아로요 대통령은 국방 분야에서도 양국 간의 협력을 다짐했고, 2004년 11월 양국 간 국방장관 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중국은 필리핀에 1000만위안의 무상 군사원조를 약속하기도 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경제 교역을 바탕으로 한 필리핀과의 관계 개선이 필리핀에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가 됐다고 판단했고, 이것이 이번 스카보러섬 영유권 분쟁에서 강공으로 나온 배경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필리핀이 중국과의 일방적인 외교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필리핀은 미군 철수 이후에도 안보 분야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우선시해 왔다. 미군 주둔협정 연장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된 후 방문군협정(VFA)을 새로 맺어 미군의 출입을 허용했다. 미군의 필리핀 기항 통지나 합동 군사훈련이 이 협정에 따라 행해졌다.
2010년 한 해만 미 해군 함정들이 63차례나 필리핀의 항구를 방문했다. 특히 2002년부터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미군과 합동특별작전부대(JSOTP-P)를 운영하며 미군 600명이 교대로 필리핀에 주둔토록 허용했다. 2008년 미 국방부는 필리핀 해양경비 프로젝트를 위해 1550만달러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필리핀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 두 패권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최대한의 실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군 기지 오염이 이슈로 부각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91년 9월 16일 필리핀 의회가 미군 철수를 결의할 때만 해도 필리핀 내부의 분위기는 ‘반미(反美)’가 강했다. 필리핀 상원이 ‘미군 기지 임대를 10년간 재연장하자’는 안을 12 대 11 한 표 차로 부결시키자 ‘1세기에 걸친 미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됐다’는 환영의 분위기가 마닐라를 뒤덮었다. 당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피플 파워’의 주역이다. 1983년 남편인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을 위해 들어오다가 마닐라공항(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서 저격 사망한 뒤 필리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1년간 장기 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내몰고 대통령에 당선된 코라손 아키노는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약화를 우려해 미군 철수에 반대했었다.
하지만 필리핀 의회는 당시 아키노의 경고를 무시했다. 필리핀이 미군 철수를 결정한 것은 1992년 필리핀 대선을 앞두고 ‘미군 기지 오염’이 정국의 이슈로 부각되면서다. 1986년 필리핀 민주화와 함께, 마르코스 정권의 21년 장기 독재를 지지해온 미국에 대한 반감도 맞물렸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축출된 마르코스의 하와이 망명을 허용해 필리핀인의 반미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결국 미국은 반미 열풍 속에서 떠났다. 하지만 코라손 아키노 정권 때 단행된 미군 철수는 20년 만에 그 아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2010년 대통령에 선출된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아키노 3세)은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이다.
1991년 필리핀과 미국은 필리핀 의회에서 미군 주둔 연장안이 부결된 후 ‘플랜B’ 마련에 들어갔으나 이 역시 ‘핵무기 존재 여부 점검’을 둘러싼 이견으로 결렬됐다. 심지어 일부 강경파 의원들은 ‘신(新)식민주의’를 운운하며 ‘미군 기지의 단계적 철수안’ 같은 중재안마저 거부했다. 1998년 대통령이 된 조지프 에스트라다 당시 상원의원은 “단계적 철거안은 기지 사용 연장을 은폐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16세기 이래 줄곧 식민 지배 겪어
‘미군 철수론자’들의 주장이 ‘반미 감정’을 타고 일반인들에게 호응을 얻은 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납득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미국은 미·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넘겨받아 1898년부터 식민 지배했다. 필리핀은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었다. 미군 철수 직후 “16세기 이래 필리핀에 주둔해 온 외국군이 물러갔다”는 환호가 나온 까닭이다.
미국의 초창기 필리핀 식민 지배가 순탄했던 것만도 아니다.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 지배 기간 미국·필리핀 전쟁(1899~1902)으로 불리는 독립전쟁을 벌였다. ‘건국 영웅’인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주축으로 한 독립세력은 미국의 지배에 저항했다. 미국은 식민 지배 초창기에 “개들을 교살하라”며 발랑기가 학살사건(1901)을 비롯해 필리핀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다.
미국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필리핀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비교적 관대한 식민 통치를 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 후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은 한때 일본으로 넘어갔지만 미국은 1945년 2월 다시 필리핀을 탈환했다. 미국은 1946년 필리핀이 독립을 선포한 직후에도 1951년 필리핀·미국 상호방위조약(군사동맹)을 체결해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광복 직후 우리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마르코스의 독재에 저항해온 필리핀의 소위 ‘민주화 세력’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반미(反美)를 외치며 줄곧 미군 철수를 주장해 왔다. 이런 정치적 흐름이 1991년 필리핀 상원에서의 ‘12 대 11’이란 표결로 나타난 것이다.
필리핀 시민들이 마닐라의 중국 영사관 앞에서 중국의 영토 야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하지만 필리핀의 민주화 세력은 미군 철수 이후의 ‘자주 국방’ 대책 마련에 소홀했다. 미군의 안보 우산 아래에 있었던 타성에 빠졌던 셈이다. 특히 ‘중국’이란 변수를 무시했다. 현재의 필리핀 전력으로는 스카보러섬은 고사하고 필리핀 본토를 지키기도 버거운 수준이다. 자국 내 민다나오섬에서 준동하는 이슬람 반군세력을 상대하기에도 벅차다.
필리핀의 총 병력은 2011년 기준으로 11만4300명에 불과하다. 그중 이슬람 반군 소탕에 투입되는 육군 7만7000명을 제외하면 스카보러섬 사태에 투입될 해군은 2만2000명이 고작이다. 1억명에 가까운 필리핀 전체 인구에 비해서도 작은 규모다. 병력 수만 230만명에 달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필리핀 국방부 역시 “군대는 약하지만 법적 논의라는 무기로 상쇄할 수 있다”며 중국에서 무력으로는 일단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 중국 인민해방군 장성들이 TV에 나와 서슴없이 ‘무력 사용’을 운운하는 것은 이 같은 필리핀의 약한 국방력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뤄위안(羅援) 중국군사과학원 연구원(인민해방군 소장)은 필리핀과 중국이 무력으로 맞서는 것을 “이란격석(以卵擊石·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라고 혹평했다.
필리핀 동정 여론에 호소
스카보러섬을 둘러싼 중국의 위협 때문에 필리핀 일각에서는 다시 미군의 지원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5월 13일에는 미 해군의 공격용 핵잠수함이 ‘물자 보급’을 명분으로 수빅만에 재입항했고 필리핀과 미국은 지난 4월 16일부터 27일까지 필리핀 남서부 팔라완섬 인근 해역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해리 토머스 주(駐)필리핀 미국 대사도 “필리핀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준수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중국도 필리핀과 미국의 합동군사훈련에 맞서 지난 5월 8일부터 필리핀 서부해상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필리핀 루손섬 서부해역은 스카보러섬과 지척이다. 중국과 대만, 홍콩 언론들에 따르면 군사훈련에 참가한 중국 남해함대는 미사일구축함과 작전함, 상륙함 등 남해함대의 최신예 함정 5척을 총동원해 상륙훈련을 위주로 훈련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스카보러섬 등 남중국해를 관할하는 중국 남해함대는 핵잠수함과 이지스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남해함대는 서사해전(1974), 남사해전(1988) 등 남중국해에서 베트남과의 두 차례 해상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전 경험도 갖추고 있다. 황셴춘(黃善春) 광둥성군구 정치위원도 지난 5월 14일 “황옌다오는 유사 이래로 중국의 영토다. 필리핀이 무슨 짓을 벌이든지, 어떤 국가(미국)를 자기 편에 끌어들여 참여시키든지와 상관없이 황옌다오가 중국의 영토라는 근본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우리 당 중앙과 우리 군은 완전한 능력과 황옌다오를 수호할 결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는 필리핀의 복잡한 현실은 이번 스카보러섬 사태를 둘러싼 여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필리핀의 정가는 물론이고 각종 여론 주도 사이트에서는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 서는 게 좋은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지난 4월 27일 필리핀 상원 외교위원회 주도로 열린 공청회에서 필리핀의 대중(對中) 외교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롬멜 반라오이씨는 “중국과의 양자 갈등에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할 뿐”이라며 “중국은 필리핀의 제2의 공식 개발원조국이며 세 번째 교역국이자 네 번째 관광수입원”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실시한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에 대한 우려도 진즉부터 터져나왔다. 필리핀 인민행동당(Citizen’s Action Party) 소속 월든 벨로 전 의원은 지난 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은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며 “지역 분쟁을 수퍼파워 간의 갈등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아시아 개발 지원 민간단체인 아시아재단(Asia Foundation)의 필리핀 대표인 스티븐 루드씨는 지난 2월 한 기고문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그래도 필리핀인들이 믿는 나라는 미국”이라는 주장을 폈다. 루드씨가 인용한 소셜웨더스테이션(Social Weather Station)의 2011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장 믿을 만한 나라’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거의 80%가 미국을 꼽았다. 미국 다음으로 호주, 일본, 중국 순으로 나타났는데, 다른 모든 나라들의 수치는 미국의 절반을 밑돌았다. 특히 중국은 신뢰 지수가 마이너스 1을 기록해 아직도 필리핀인이 불신하는 나라로 나타났다.
중국과의 경제 교역 등 실리에 집착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중국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필리핀에는 20년 전의 반미 대신 반중 감정이 들끓고 있다. 그래도 영토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키노 대통령은 지난 5월 16일 필리핀 마카티시 월튼 비즈니스스쿨 졸업생 포럼에 참석해 “서(西) 필리핀해에 매장된 막대한 천연가스를 주변 국가들이 활용하는 것을 바라지만 우리 영토를 포기할 권한은 내게 허용된 바 없다”고 말했다. 아키노 대통령은 “외교적 수단에는 동의하지만 중국 공산당과 쌍방 협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유엔 등을 통한 외교적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이다. 필리핀의 좌파 정당인 아크바얀의 마리 크리스 카브레로스 대표 역시 “우리는 작은 국가지만 중국이 필리핀의 영토권을 짓밟아 뭉개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 사안을 국제화해 중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이웃의 통치권을 침범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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