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기...

 

청송에서의 5년이란 시간 동안 내 화두란 바로 "마음을 비우자!" 였다. 결심만큼 순순히 마음이 비워진다면 누구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될수 있을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다반사 였다...

 

하지만 살아가는 내내 노력하기로 했다.

살아온 길을 하나하나 되짚다보니 그저 헛헛하기만 했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자니 막막 하기만 했다. 어쨌건 몸뚱이 하나를 밑천 삼아 살아온 세월만 십여년에 어느덧 삼십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딸아이는 곧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놈도 몇년 후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될 것이고...

 

학생인 자식을 둔 아비로서 보란듯 내놓을 건 하나도 없고, 흠집 투성이인 나...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고인이 되신 어느 선배의 살아 생전에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건달은 마누라 생기고 자식 낳고나면 건달로선 끝난 생명이다." 당신의 연고지인 전주는 물론이고, 약관의 나이에 서울의 중심인 종로에 입성해 독보적인 신화로 불리던 양반의 입에서 나온 말 이었다. 워낙 혈기왕성하던 나이에 들은 그 말은 내게 그다지 현실감있게 다가오질 않았지만, 공감은 갔었다.

 

아내와 자식이 눈에 밟히는데 어떻게 쇠파이프에 사시미칼이 난무하는 그 험한 바닥에서 자신만을 고집하면서 생활할수 있겠는가!... 결국 그분은 자기 식구에게 칼 맞아 죽은 반대파 친구를 조문하러 갔다가 영안실에서 수십명에게 칼을 맞고 운명을 달리 하셨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살배기 딸을 남겨둔 채...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이란게 모양이나 방법의 차이일뿐 모두다 똑같을 것이다. 나 역시 자식 생각이 날때마다 내 현실이, 살아온 과거가, 짧디짧은 가방끈 길이마져도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일단 부족한 학벌의 길이부터 늘려보기로 했다. 검정고시반을 자원했다. 일년여 만에 고입,대입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다. 물론 그런 곳에서의 검정고시란게 백프로 내 실력만은 아니었겠으나 난 운이 좋았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했다. 이제 출소하면 내 자식들 가정통신란의 아버지 학벌란에 당당히 써넣을 수가 있었다. 중짤이 아닌 대짤로...ㅎㅎ

 

검정고시반에 있으면서 주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출소 후의 앞날을 대비 하다보니 공인중개사니 부동산이니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경제신문을 보다가 뭔가 모를 끌림에 주식으로 관심이 흘렀던 것이다.

 

독방에서 나올때까지만 해도 난 경제의 ㄱ자도 모르던 사람 이었다. 신문도 스포츠 신문외에는 일간지 조차도 외면하던... 옆동료의 조언으로 경제 신문부터 탐독하기 시작을 했으나 전혀 생소한 단어와 전문용어들 앞에서 늘 쩔쩔매기 일쑤였다.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다. 내게 끈질긴 집념을 심어준 계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어느 신문기사의 토막란에 실린 두어줄의 내용을 읽게 되면서 이다. 나이 사십을 바라보는 어느 중년 주부의 기사 였다. 그 해, 지방에 있는 대학 입학 시험에 차석으로 합격을 했다는 기사였는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학의 나이로 왜? 굳이 대학엘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냐?"라는 질문에 그 주부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사람에겐 저마다 세번씩의 기회가 온다는데 세상을 살아오면서 난 한번도 기회란 걸 잡아보질 못했다. 기회가 왔었는지 조차 몰랐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때론 이것이 그 기회는 아닐까?... 싶으면서도 망설이다가 그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결코 어리석고 무지하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게 그 기회가 왔을때 악착같이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고 공부를 했고, 이제 그 기회에 한 발자국 다가섰다"라고... 기자란 놈의 우문에 현답을 준 것이다.

 

돈 없고 빽 없어도 오직 나만의 능력으로 기회를 부여 받을 수 있는 곳... 난 주식시장이 바로 그 해답 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때부터 주식공부로 불철주야, 3년여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검정고시반에서 수학의 사칙연산 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가지씩 기초부터 닦아 가야겠다는 의지로...

반가운 소식이 하나 둘 날아 들기 시작했다. 예전 막둥이 시절, 채무 해결건으로 소개 받아 의형제의 연을 맺어온 내 인생의 선배이자 형님인 분이 면회를 오셔서 법무부와 교정국, 그리고 감호국 등에 연줄을 넣어 내 조기 가석방 문제를 작업중이니 아무 걱정 말고 몸이나 건강하라는 말씀을 하고 가신 것이다.

 

아내 또한 전문적인 네일아터로서의 배움을 위해 일본 유학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자그만 비디오 가게를 내면서 평범한 가정 주부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유학 문제를 놓고서 고심 하던 아내에게 일침으로 결론을 내리게 해주신 분은 다름아닌 장모님 이셨다고 한다. "지금 니가 유학을 간다면 오지에서 그나마 마음잡고 애쓰는 이서방이 얼마나 더 힘들겠니?"라고... 난 역시 장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맏사위 였던 것이다.

 

이번엔 컴퓨터 반으로 옮겼다. 솔직히 그때까지의 난 컴맹 이었다. 출소 후 본격적으로 주식을 하려면 컴 정도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 이었다. 컴퓨터 반에서의 일년 내내 주식공부와 컴퓨터 공부를 병행했고, 틈틈히 한자 공부까지 한 덕분에 난 그곳 생활 3년여 기간동안 총 아홉 가지의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는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사회생활에 그다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난 당시를 돌아보면 '그땐 내가 정말 열심히 했었구나!'라고 만족하곤 한다. 동료들이 다들 잠자리에 든 시간에 책상을 펴고 앉아 정신없이 공부에 몰두 하다보면 시간 가는줄도 몰랐다. 다리가 저리고, 소변이 마렵다는 인식이 들때쯤, 그제서야 시계를 보면 새벽 서너시가 다반사이기도 했으니... ㅎㅎ

 

아내는 감호국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관계 직원들에게 머리 조아려 읍소를 하고, 법무부 장관이나 청와대 민원실, 심지어는 당시의 국가 영부인 앞으로도 탄원서를 올려가며 날 위해 헌신적인 수발을 들었다.

 

결국 난 징역과 감호를 모두 합쳐 4년 11개월만에 그곳에서 나올수가 있었다. 감호만도 4,5년 이상은 복역해야 하는게 당시의 관례라면 관례 였는데... 난 그들보다 수년이나 당겨 나오게 된 것이다. 출소 전날 가석방 소식을 통보 받자 모두들 자기들 일처럼 기뻐해주고 축하해주면서 난리였다. 동료들에겐 얼마나 미안하고 고맙던지...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내가 나가는 건, 아내의 정성을 하늘이 알아주신 거라면서 나가면 아내를 들쳐업고 서울까지 걸어가라는 농담까지... 그들 모두 내가 얼마나 부러웠을지를 안다. 그들의 인간미에, 정에, 사람 냄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철컹!!! 언제까지고 열리지 않을 줄만 알았던 육중한 철문이 활짝 열리고, 자유를 잔뜩 머금은 눈발이 펑펑~소담스레 내려주던 2003년의 12월... 난 그곳에서 나왔다.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내를 안아주며 난 썰렁한 농담을 한마디 건넸다. "오랫만에 안아보니까 그동안 살이 장난아니게 쪘네?" 아내는 더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흘린 눈물이 하도 많았기에 이젠 눈물샘도 다 말라버린 것이리라... 내 농담에 아내는 화사하게 웃으며 레이스를 감았다."나 살쪘어도 다들 이쁘기만 하대!" 혀를 낼름거리며 웃는 소녀 같은 아내 앞에서 난 정말로 오랫만에 하하 거리며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선배 형님도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한마디 거든다.

 

"이제 더 이상은 제수씨 맘 아프게 하지 마라! 늙어서 이빨 빠지고, 기운 빠지면 제수씨한테 구박 받는다..." 것봐라 하는 듯이 목젖까지 보이며 아내가 크게 웃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난 지독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5년만의 서울은 나를 구토와 함께 받아들인 것이다.

 

그동안 내 속에 쌓였을 오물 덩어리를 결코 용납치 않겠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