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HEA SANDIQUE-CARLOS
 
베니뇨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이 피임과 학교내 성교육을 증진하는 법안에 서명했다는 사실이 이달 29일(토) 공개됐다. 이로써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수호하며 이 법안에 반대해온 로마가톨릭교회의 반발이 예상된다.
 
필리핀 대통령 부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아키노 대통령이 필리핀 저소득층에 피임을 권장하는 가족계획법안에 21일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 법안은 내년 1월 발효된다.
 
찬성 진영은 거의 14년 넘게 묵혀뒀던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급증하는 인구를 조절할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됐다고 평가했다. 필리핀은 동남아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다. 필리핀 인구는 1990년 6,070만명에서 현재는 1억명에 달할 만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반대 진영은 가족계획법(출산보건법)은 신앙심이 두터운 필리핀의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며, 가족계획법으로 일단 물꼬를 틀면 결국은 이혼법도 통과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교계는 이혼법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필리핀 가족생활위원회 카톨릭주교협회장인 가브리엘 레이에스 주교는 “필리핀 헌법에는 정부가 가족과 결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면서 “출산보건법은 가족의 안녕과 결혼의 안정성에 해가 된다”고 선언했다.
 
권투선수로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매니 파퀴아오는 라스베이거스 특설링에서 최근 KO패를 당한 후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 파퀴아오 의원은 출산보건법이 ‘생명의 존엄성’에 위배된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본 법안에 찬성하는 대표적 인사인 피아 카예타노 상원의원은 의회가 이혼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루스 야간 의원이 이혼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현재 상임위원회에서 검토 중이다. 교회 지도부는 이혼법을 추진하면 가족계획법 관련 논쟁으로 찬반 대립이 이미 극심해진 필리핀이 또 한 번 몸살을 앓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격을 준비 중이다.
 
가톨릭교도가 국민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필리핀은 바티칸을 제외하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다. 중남미 국가를 비롯해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등 다른 카톨릭 국가들은1970년대 이후 사회적 태도가 변화하면서 이혼을 합법화했다.
 
전체 인구 1억400만 명 가운데 약 75%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교계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성직자들은 1986년에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2001년에는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물러나게 만든 시민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필리핀은 아시아 유일의 가톨릭 국가이기 때문에 필리핀 국민들에게 신앙심은 국가적 자부심과 일맥상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리핀 내부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혼법 추진 여부는 독실한 카톨릭신자인 故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베니뇨 아키노 3세 현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있다고 전망했다. 베니뇨 아키노 3세 대통령은 높은 경제성장률과 지지율 덕분에 최근 상승세를 구가하고 있다.
 
정치평론가인 프로스페로 데 베라 필리핀대학교 교수는 “대통령이 가족계획법에 서명함으로써 정치적 입지가 공고해졌다”며 “베니뇨 아키노 3세 대통령도 자신의 모친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처럼 가족계획법에 찬성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의외로 독립적인 노선을 보임으로써 교계에 일격을 가했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가족생활위원회 가톨릭주교협회 사무국장인 멜빈 카스트로 신부는 이혼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결혼은 평생 헌신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결혼의 신성성을 보호해야 한다. 결혼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혼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 근원적인 이유를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가족계획법을 둘러싼 논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필리핀 가족생활위원회 가톨릭주교협회는 본 법안이 가족이 사회의 근간이라고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근거를 들어 가톨릭 변호인단을 통해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많은 필리핀 국민들은 인구증가와 빈곤감소를 해소하기 위한 아키노 행정부의 노력에 동조하고 있다. 마닐라 소재 여론조사단체인 ‘펄스 아시아’가 201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9%가 본 법안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키노 대통령이 가족계획법안에 비공개적으로 서명한 것을 보면 아직까지 본 법안에 대해 뚜렷하게 찬성할 의지가 있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영어 원문 :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1278873246691045782088913900069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