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서 40대 한국인 여성 피살… 올 들어서 벌써 4번째

한국인, 특별한 표적인가
작년 해외 피살자 20명, 절반이 필리핀에서 희생
관광 100만·체류 9만명… 사람 많다보니 사건 많아

경찰력만 믿기엔 불안
등록된 지문 1%에 불과, 수사·재판 아주 느린 편
한국 조폭들까지 건너가 도박·마약 범죄 손대기도

교민·관광객 행동요령은
문화적 차이 무시하고 자존심 상하게 하면 위험
가지 말라는 곳 가지 말고 총 든 상대에게 저항 금물

 

2015-03-02 11_23_59-[Why] 불법총기만 100만정… 필리핀서 위험 警告 흘려들었다간 큰 낭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png

 

지난달 25일 외교부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과 바실란, 술루 등 지역에 대해 '특별 여행 경보'를 발령했다. 교민·여행객들은 이 지역을 방문하지 말고, 이미 그 지역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은 즉시 안전한 곳으로 철수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부는 "특별 여행 경보가 발령되지 않은 다른 필리핀 지역에서도 신변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 줄 것을 강력히 당부한다"고도 했다.

그로부터 약 2주일 후인 지난 9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 북동쪽 케손시티의 한 커피숍에서 40대 중반 한국인 여성이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현지 경찰은 이 여성이 휴대전화를 빼앗으려는 강도에게 저항하다 변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올 들어 필리핀에서 피살된 한국인은 4명이 됐다.

필리핀에서 발생하는 한국인 피살 사건이 최근 1~2년 새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정부 조사 결과 2009~2013년 해외에서 발생한 우리 국민 피살 사건 160건 가운데 22.5%인 36건이 필리핀에서 발생했다. 작년엔 전체 해외 피살 사건 사망자 20명 중 10명이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 중국보다 많다.

필리핀은 한국 여행객이 아주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는 "2013년 필리핀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 수가 태국에 이어 동남아에서 둘째로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인 방문객이 100만명을 넘는 동남아 국가는 홍콩과 필리핀, 태국 등 세 나라뿐이다. 인구 1억600만명에 6·25전쟁 땐 7000명이 넘는 군인을 파병했던 전통적 우방 국가 필리핀은 한국인에게 위험한 나라일까.

"한국인은 최대 관광객"… 특별한 표적 아니다

필리핀 현지에선 "한국인 피살 사건이 이전에도 종종 발생했다"는 말이 나왔다.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된 것은 지난해 3월 유학생 이모(21)씨가 마닐라 시내에서 택시를 탔다가 납치돼 36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한국인 유학생이 범행 대상이 된 것도, 마닐라 시내에서 한국인 납치가 발생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후 필리핀의 한국인 피살 사건이 국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정치권도 관심을 가졌다. 작년 9월 새정치민주연합 신학용 의원은 외교부가 제출한 '재외 국민 사건·사고 현황' 자료를 공개했다. 2013년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국인 대상 범죄는 총 780건이었는데, 이는 중국의 598건보다 많았다. 또한 살인 사건은 2011년 7건, 2012년 6건, 2013년 12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지난해엔 10건이었다.

우리 정부와 현지 치안 당국은 "한국인을 콕 집어 표적 삼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필리핀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 2013년 한국인 방문객은 116만6000여명이었다. 필리핀과 역사적·군사적으로 특수 관계인 미국(67만5000여명)보다 73%나 많았다. 그다음이 일본(43만4000여명), 중국(42만6000여명)이었다. 필리핀 입장에선 한국인이 최대 고객인 셈이다.

필리핀 방문객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크게 늘었다. 국내에서 해외여행이 중산층까지 퍼지면서 대중화된 시기와 맞물린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필리핀 방문객은 2009년 50만명도 안 됐는데, 3년 후인 2012년 100만명을 돌파했다"며 "동남아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싼 물가, 가까운 거리 등이 필리핀을 매력적인 관광지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태국의 방콕·푸껫 등은 비행 시간이 6시간 이상인데, 필리핀 마닐라는 4시간이면 갈 수 있다"며 "3박4일짜리 여행 상품이 인도네시아·태국에선 잘 안 돼도 필리핀에선 가능하다"고 말했다.

필리핀 현지에 체류하는 사람도 많다. 외교부 관계자는 "교민과 기업 직원 등 한국인 체류자는 현재 약 8만8000명"이라고 했다. 현지 한 교민은 "최대 15만명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인도는 필리핀 체류 인구가 7만명, 중국 3만명, 미국 3만2000명, 일본 1만8000명 등으로 추산된다.

현지 한 소식통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인 연간 피살자는 인구 10만명 기준 8명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도 필리핀을 방문하거나 현지 체류 중 피살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체류 인구 대비 피살자 비율을 보면 2009~2013년 10만명당 중국인 28.6명, 인도인 23.1명, 미국인 21.2명, 영국인 20명, 일본인 16.6명 등으로 한국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

총기 사건 많고 청부 살인도

필리핀에선 총이 흔하다. 한 국내 기업 파견자는 "시내 주요 호텔·건물·쇼핑몰 등에선 총을 든 보안요원을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심각한 점은 불법으로 제조·유통되는 총기가 하도 많아 통계조차 잡을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필리핀에선 "불법 총기만 100만정이 넘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공식 판매되는 총 가격은 1만페소(약 25만원) 안팎. 하지만 불법 사제 총기는 그 절반 이하로도 살 수 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살려고 불법으로 총을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총기들이 납치와 강도, 살인 등에 사용된다"고 말했다. 한국인 중에서도 이런 불법 총기 소지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한국인 형제가 싸우다 형이 총으로 동생을 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경찰력이 취약하고 사법제도가 잘 갖춰져 있지 않아 수사와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필리핀에선 우리 같은 주민등록 제도가 없어 지문을 활용한 수사가 활발하지 않다. 운전면허증 발급 등 특별한 경우에만 지문을 등록하기 때문에 필리핀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지문이 100만개(인구는 1억명 이상)도 안 된다고 한다. 또, 체포영장이 발급되는 데 보통 3~6개월이 걸리고, 1심 재판은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 지나야 시작될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안한 치안은 범죄자들에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분석이다. 한 소식통은 "범죄자들이 경찰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다 청부 살인이 만연해 있다는 걸 알고 정말 놀랐다"고 했다. 현지에선 "전문 킬러가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받는 돈은 10만페소(약 250만원) 정도"라는 말도 나왔다.

청부 살인엔 한국인이 개입돼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지 경찰 주변에선 "작년 한국인 피살 사건 8건(10명 사망) 중 3건, 2013년은 11건(12명 사망) 중 3건이 한국인이 배후인 청부 살인으로 추정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에서 건너간 조직폭력배가 필리핀 현지에서 각종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과 필리핀 경찰은 특히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의 범죄' 중에는 이 조폭들이 깊이 개입해 있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국내 조폭들이 필리핀까지 진출해 각종 불법이나 이권 사업에 손을 대고 있다는 첩보가 있다. 이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죄를 짓고 도망간 불법 체류자나 쉽게 돈을 벌려는 극소수 교민 중에선 카지노와 마약 등 '검은 산업'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 남성 4명이 납치됐다가 몸값 일부를 지불하고 풀려난 적이 있는데, 이들도 마닐라 인근에서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조폭과 불법 체류자 등이 필리핀 현지에서 불법 사업을 벌이고, 이를 둘러싼 알력과 이권 다툼 등이 한국인 폭력·살인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제발,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않았으면…"

 


	필리핀 특별여행경보지역
 
 
경찰청은 최근 경감급 경찰관 1명을 추가로 필리핀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필리핀에 근무하는 한국 경찰은 6명으로 늘었다. 미국 파견 경찰(5명)보다 많은 숫자다. 한국 경찰은 현지에서 정보 교류는 물론, 직접 수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경찰청은 또 내년부터 3년 동안 60억원을 들여 필리핀에 과학수사 등과 관련된 교육과 조언도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만으론 필리핀 내 한국인 대상 범죄를 막거나 줄이기는 어렵다. 필리핀 전체 치안 수준과 수사 능력을 올리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현지 교민과 경찰은 필리핀 현지 사정을 모르고 행동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피할 수 있는 사건으로 피해를 본 측면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현지인들이 가지 말라는 곳을 굳이 가고, 하지 말라는 것을 꼭 해보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사관이나 여행사에서 위험한 지역에 가지 말고, 혼자 다니지 말고, 택시를 타지 말라고 충고해도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현지 한 정부 산하단체 관계자는 "요즘에도 유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택시를 탔다가 납치를 당하는 경우가 한 달에도 꼭 1~2건씩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는 다른 필리핀의 치안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경찰 관계자는 "미국에선 총 든 강도를 만났을 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필리핀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더라"며 "필리핀을 한국만큼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다간 큰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키 작고 어리게 보인다고 총 든 강도에게 저항하다 화를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강도나 불량배 들은 마약을 한 상태가 많기 때문에 작은 충돌이 살인 사건이나 강력 범죄로 커지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교민은 "강도가 돈·휴대전화를 달라면 일단 주는 게 안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문화와 관습이 다르고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필리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경우도 있다"며 "상대방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큰코다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