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과 여성 비하 등 거친 언행으로 '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난제를 만났다.

국민의 반중 감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도 얽힐 정도로 복잡한 남중국해 문제다. 

필리핀이 제소한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가 지난 12일 중국에 완패를 안겼지만, 후폭풍이 거세다.

PCA 판결 다음 날 페르펙토 야사이 필리핀 외무장관이 "우리의 승리가 기쁘지만 신중하게 자제력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필리핀 측의 고민을 보여준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AFP=연합뉴스]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미 중국과의 양자 대화 의사를 밝힌 가운데 미국과 중국이 필리핀을 상대로 외교전에 시동을 걸고 있다.

류전민(劉振民) 외교부 부부장은 13일 "남중국해 상에 방공식별구역을 선언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며 남중국해 영유권 강화 행보를 계속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히는 동시에 필리핀에 조속히 양자협상의 궤도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두테르테 대통령이 오는 9월 광시(廣西)좡족자치구 난닝(南寧)에서 열리는 '중국-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대화협력관계 구축 25주년 정상회의'에 참석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담판'을 지을지 주목된다.

제이 바통바칼 필리핀대 교수는 현지 언론에 "두테르테 대통령이 첫 해외 방문국으로 중국을 고려해야 한다"며 "이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양국의 손상된 관계를 복원할 의향을 세계에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필리핀 정부가 중국과 남중국해 자원을 공유할 생각이 있다고 밝힌 만큼 어떤 행태로든 양국 사이에 대화 채널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PCA 판결의 이행을 막고 필리핀과 미국, 일본의 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필리핀에 경제지원 보따리를 풀 가능성이 크다.

이달 초 중국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필리핀이 지금이라도 소송을 취하한다면 중국은 필리핀과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며 "양국 간 협상에 과학연구 분야의 공동개발과 협력 등의 이슈가 포함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리처드 헤이다리안 필리핀 데라살레대 교수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과 거래를 한다면 중국은 많은 '당근'을 내놓을 것"이라며 PCA 판결을 무력화하기 위한 중국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지적했다.

레티시아 라모스-샤하니 전 필리핀 상원 외교위원장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과 협상할 때 나라를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남중국해 승소' 기뻐하는 필리핀인들[AP=연합뉴스]

중국에 PCA 판결 이행을 압박하는 미국은 필리핀이 중국에 기울지 않도록 경제·군사적 지원을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성 김 필리핀 주재 미국대사 내정자는 "양국 간의 안보협력을 강하고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필리핀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며 "여기에는 남중국해 긴장완화를 위한 필리핀의 노력을 지원하고, 필리핀 공군이 남중국해 연안의 자국 해역을 더 잘 감시하도록 지원하는 내용 등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일본 또한 필리핀과 경제·방위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나카오 다케히코(中尾武彦) 총재는 13일 두테르테 대통령을 만나 필리핀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빈곤 감소 등을 위해 더 많은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ADB는 올해 상반기 필리핀 수도권의 인프라 개선을 위해 5억8천300만 달러(6천674억 원)의 차관을 승인한 데 이어 하반기에는 청년 고용과 도로 개선 등을 위해 7억7천만 달러(8천815억 원)를 추가로 제공할 계획이다.

일본 해상보안청과 필리핀 해양경비대는 이날 남중국해를 마주 보는 필리핀 마닐라 앞바다에서 양국 경비정과 헬기 등이 참가하는 합동훈련도 했다.

이처럼 강대국들이 필리핀을 압박하거나 구애의 메시지를 보내는 가운데 중국과 화해해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국민의 반중 정서를 어떻게 다루며 남중국해 해법을 내놓을지 관심을 끈다.

12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중국의 남중국해 판결 수용을 촉구하는 시위[EPA=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