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준 <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 6·25 부산항 터그보트와 2019년 인천항 크루즈의 간극 6·25 戰禍 딛고 경제 풍요 쌓아올린 한국 이젠 앞세대 헌신도, 차세대 잠재력도 폄하 '빈곤의 유산' 물려주기 전 세대교체 필요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부친은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이후 공산 치하의 북한에서 월남해 서울에 머물다가 6·25전쟁으로 부산까지 피란해 정착했다. 중국 국경인 압록강에서 출발해 일본과 인접한 대한해협에서 멈췄으니 크로스 컨트리(cross country)를 한 셈이라고 생전에 농반진반으로 말씀한 긴 여정이었다. 피란지에서 굶지 않으려면 중학생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부둣가에서 잡일을 했다. 당시 미군 해상수송사령부가 있었던 부산은 보급선의 허브였다. 대형 화물선에서 하역한 군수물자를 미군 터그보트(예인선)와 중소형 선박들이 인천, 포항, 군산 등지로 실어 날랐다. 미군에 고용된 필리핀 출신 선장, 기관장 밑에서 한국인들은 식당, 주유, 청소 등의 잡일을 했다. “우리보다 10배의 임금을 받는 필리핀 사람들이 부러웠다. 어린 나이에도 국력에 따라 개인적 삶이 규정됨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내가 살아서 우리나라에서 잡일하는 필리핀 사람들을 보게 됐다”고 회고하곤 했다. 연전에 인천에서 출발하는 1주일간의 동북아 크루즈에 탑승한 적이 있다. 국내 관광회사에서 임차한 이탈리아 선적의 전세선이라 승객 3000명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선장, 기관장, 식당·호텔 등 책임자를 중심으로 영국, 인도, 필리핀, 중국 등 28개국 출신 1000명의 승무원들이 공연, 접객, 주방, 청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작은 지구의 주인공은 중·노년에 접어든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필자로서는 20세기 후반 급속히 진행된 경제성장의 결과물을 일상에서 체감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