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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인간은 모두 죽는다. 범인(凡人)은 물론이고 영웅(英雄)도, 선인(善人)과 악인(惡人)도 죽는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역사가 된다. &lt;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100가지 암살사건&gt;(지식갤러리)에서 전하는 &lsquo;암살의 역사&rsquo;가 그러하다. 역사상 유명인들은 왜 죽어갔을까? 왜 누군가는 그들을 죽여야 했을까?</p> <p>이 죽음들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때로는 결과이기도 했다. 한 개인의 죽음이 사회의 발전 동력이 되기도, 퇴보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선 인류의 역사가 &lsquo;암살의 역사&rsquo;라고도 할 수 있다.</p> <p>이 책에서 소개하는 &lsquo;한국사의 가장 극적인 암살사건&rsquo; 20가지를 정리했다. 신하가 왕을, 왕이 신하를 죽인다. 새로운 권력이 기존 권력을 뺏는다. 배신과 숙청, 의심과 탄압, 정치&middot;사상의 대립, 국가 간 침략과 저항 등 온갖 사건들이 암살을 둘러싸고 얽혀있다. 한반도 역사 속 인물들은 어떠한 이유로 남의 칼에 맞아 죽었을까.</p> <p>&nbsp;</p> <p>■국익과 망국의 갈림길에 선 고구려, 영류왕</p> <p>&nbsp;</p> <p>&nbsp;<br />KBS 드라마 &lsquo;칼과 꽃&rsquo;에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대당 화친 정책에 반발해 그를 시해하고 있다.<br />고구려 영류왕(營留王)은 618년 이복형인 영양왕이 죽은 뒤 27대 왕에 올랐다. 그가 즉위한 해, 중국 대륙에선 수나라가 패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의 친당 성향이 강해지자 신흥 귀족인 연개소문이 반발했다. 숙청 낌새를 알아챈 연개소문은 642년 반정을 일으킨다. 연회 장소에서 온건파 대신 100여명을 참살하고 궁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했다. 연개소문의 시역은 당나라 고구려 침공의 표면적인 명분이 됐다. 구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영양왕의 시체를 토막 내어 구덩이에 던졌다는 설도 있다. 실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권력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는 결국 668년 멸망한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유명했던 연개소문은 당 태종 시대를 소재로 삼은 중국 경극에선 황제를 위협하는 악역으로 등장한다.</p> <p>&nbsp;</p> <p>■동아시아 삼각무역 주도한 바다의 왕자, 장보고</p> <p><br />&nbsp;<br />장보고(長保皐)는 790년경 통일신라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분제(골품제) 아래서 관직 진출 한계를 느낀 장보고는 친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무관으로 출세했다. 신라로 귀국한 828년 흥덕왕에게 완도 지역(청해)에 진영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특수 관직인 청해진대사로 임명된 장보고는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고 삼각(신라, 당나라, 일본)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재력과 외교력을 바탕으로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보고는 왕위쟁탈전에서 김우징을 도와 그가 신무왕으로 즉위했다. 얼마 후 신무왕이 급사해 그 아들인 문성왕이 즉위했다. 장보고는 신무왕 즉위 전 약속대로 딸을 왕비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미천한 출신을 문제 삼아 대신들이 반대한다. 장보고는 841년경 문성왕의 밀명을 받은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장보고가 죽고 851년 청해진은 폐지된다. 그를 제거한 신라 조정은 지방 통제를 상실했으며, 청해진 폐지로 동아시아 네트워크는 붕괴된다. 이어 군웅할거의 후삼국시대가 열린다.</p> <p>&nbsp;</p> <p>■미륵정토를 꿈꾼 제왕의 신화적 파멸, 궁예</p> <p><br />&nbsp;<br />KBS드라마 &lsquo;태조왕건&rsquo;의 궁예.<br />궁예(弓裔)는 9세기 중반 통일신라에서 태어났다. 신라 지배층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탄생 당시 불길한 징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한쪽 눈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인 진성여왕 5년(891년)에는 각지에서 군벌이 발흥했다. 궁예는 이 무렵 절을 떠나 세력을 키운다. 그는 901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후고구려)로 하고 송악(개성)을 수도로 삼았다. 잔존한 신라, 견훤의 백제(후백제)와 &lsquo;후삼국시대&rsquo;로 일컬어지는 분할 지배를 한다. 궁예는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개칭하면서 혼란한 세상에서 백성들을 구원할 &lsquo;미륵불&rsquo;을 자처했다. 918년 왕건 등 후고구려계 호족들의 반란으로 왕좌에서 쫓겨났다. 변장 후 도망쳤지만 백성들에게 살해됐다고도 하고, 민간 전설에는 항전 중 전사했다고도 한다.</p> <p>궁예는 머리에 금 고깔을 쓰고 행차시에는 승려 200여명이 찬불가를 부르며 따르도록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lsquo;관심법&rsquo;을 주장하며 저항세력을 탄압했다. 그가 지은 불경을 요사스럽다고 비판한 승려 석총은 철퇴로 때려죽이고, 왕후 강씨는 간통죄로 몰아 두 아들과 함께 살해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lsquo;승자&rsquo;인 왕건이 세운 고려시대의 기록이다.</p> <p>&nbsp;</p> <p>■간신의 전형이거나 민족의 자존심이거나, 묘청</p> <p><br />&nbsp;<br />묘청(왼쪽)과 김부식<br />묘청(妙淸)의 출신은 알 수 없다. 고려 서경(평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출가했다고 한다. 그는 고려 인종 때인 1127년 서경파 신진관료들의 추천으로 왕실 고문이 됐다. 묘청은 동아시아의 신흥 강자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반대하고, 정벌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풍수지리를 근거로 땅의 기운이 다한 개경에서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설득했다. 개경파 문벌귀족 김부식은 현실성이 없다며 이를 반대했다. 인종은 묘청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천도 직전 불길한 사건사고가 이어졌다. 묘청의 권위가 하락하고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은 심화됐다. 결국 묘청은 1135년 군사를 일으켜 문벌귀족 타도에 나섰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서경 토벌을 맡겼고,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던 서경파는 우왕좌왕했다. 묘청과 함게 정변을 일으켰던 조광은 묘청을 암살했다. 반란은 1년 만에 진압됐고, 서경성이 함락된 후 묘청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헤쳐져 부관참시됐다.</p> <p>1920년대 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lsquo;묘청의 난&rsquo;을 1000년 간 민족사의 성쇠를 좌우한 사건 중 첫 번째로 평가했다. 사대주의를 거부한 진취적 사상이 식민지 현실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묘청이 러시아의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비견될 &lsquo;요승&rsquo;이라는 평가도 있다.</p> <p>&nbsp;</p> <p>■무신정권을 낳은 곪아버린 시대의 폐왕, 의종</p> <p><br />&nbsp;<br />의종의 유배지였던 거제도의 폐왕성 | 경향신문 자료사진<br />의종(毅宗)은 1127년 고려 인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146년 18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선대에 실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문벌귀족을 견제했다. 그는 측근으로 환관들과 정중부 등 무신들을 발탁했다. 하지만 문신들의 반발로 무신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의종은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하고 향락을 일삼았다. 1170년 &lsquo;무신정변&rsquo;이 일어났다.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했을 때 문신 50여명이 무신들에게 도륙됐다. 의종은 폐위되고 동생 명종이 무신들에 의해 옹립됐다. 100여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의 시작이었다. 1173년에는 의종의 복위와 문신정권 탈환을 꾀한 &lsquo;김보당의 난&rsquo;이 실패했다. 그해 말 의종은 이의민에게 척추가 부러져 살해됐다.</p> <p>&nbsp;</p> <p>■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p> <p><br />&nbsp;<br />개성 봉명산 기슭에 있는 공민왕 무덤 현릉과 노국대장공주 무덤 정릉(내부에 서로 이어지는 작은 통로가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br />공민왕(恭愍王)은 1330년 고려 충숙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41년 열두 살의 나이로 원나라 조정에 입조했다. 1349년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애정이 각별한 부부였다. 1351년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자 고려로 귀국해, 1352년 31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반원자주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근이 계속돼고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암살 위협도 있었다. 1365년 왕비가 난산 끝에 사망하면서 삶의 의지를 상실했다. 공민왕은 친정을 포기하고 승려 신돈을 중용했다. 신돈은 혁신정책을 펼쳤으나 독재와 추문으로 공격받아 1371년 숙청됐다. 공민왕은 1374년 10월27일 친위대인 자제위 소속 홍륜과 환관 최만생 등에 난자당해 사망했다. 암살자들은 사지가 찢기고 삼족이 멸해졌다.</p> <p>이들이 공민왕을 살해한 데는 후사 문제가 얽혀있다고 전해진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자녀가 없었다. 신돈의 첩 반야를 통해 아들 모니노(우왕)을 얻었으나 혈통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 후궁 익비가 홍륜과 간통으로 임신하자 이를 은폐하려 그를 죽이려 했다고 한다. 최만생이 자신도 제거될 것이 두려워 이 사실을 홍륜에게 알렸고, 공민왕 참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친원파 권문세족이 시해를 사주했다는 설과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추문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있다.</p> <p>&nbsp;</p> <p>■암살자에 의해 충절의 상징이 된 정치가, 정몽주</p> <p><br />&nbsp;<br />북한 개성의 정몽주 영정 | 경향신문 자료사진<br />포은 정몽주(鄭夢周)는 1338년 경상도 영일현에서 태어났다. 유학자 이색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정도전과 절친했다. 1360년 문과 장원으로 급제해 1371년에는 성균관사성에 올랐다. 외교 분야에서 여러 성과를 거둔 정몽주는 1383년 고려의 요동 정벌 계획을 입수한 명나라가 출병을 준비하자 사신을 자원해 대명 국교를 회복시켰다. 명나라가 동북 영토를 요구해 최영의 강경론과 이성계&middot;정도전의 외교론이 충돌했을 때는 후자를 지지했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우왕 복위계획이 발각되자 창왕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정몽주는 이 같은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는 반대했다. 역성혁명을 주장한 정도전과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정몽주는 1391년 이성계가 병상에 있는 기회를 노려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그는 1392년 4월26일 죽음을 예감하고도 이성계를 문병했다. 귀가 도중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살해됐다.</p> <p><br />&nbsp;<br />정몽주가 암살된 개성 선죽교 | 경향신문 자료사진<br />정몽주는 나라를 어지럽힌 역적으로 효시됐다. 시신은 송악산 승려들이 수습했고, 형제들은 연좌제로 죽거나 유배됐지만 아들들은 무사했다. 1401년 정몽주는 자신의 암살을 계획한 태종 이방원에 의해 &lsquo;문충&rsquo;(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건국 당시 간신으로 취급됐던 정몽주가 &lsquo;충절의 상징&rsquo;이 된 것은 태종이 정도전을 깍아내리기 위해서라는 지적도 있다.</p> <p>&nbsp;</p> <p>■자신이 세운 왕조에 버림받은 국가 설계자, 정도전</p> <p><br />&nbsp;<br />삼봉 정도전 | 경향신문 자료사진<br />삼봉 정도전(鄭道傳)은 1342년경 경상도 봉화 지역의 세습 호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목은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와 함께 수학한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상사회로 고려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품었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한 정도전은 권문세족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고려 왕조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역성 혁명을 꿈꾼 정도전은 1383년 정몽주의 소개로 이성계와 만났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잡자 중용된다. 조세 및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우왕 대신 창왕을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구세력을 제거해 급진개혁 세력의 중심이 됐다. 정몽주에게 잇따라 탄핵을 받았던 정도전은 정몽주가 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내 이성계를 임금으로 하는 새 왕조를 개창했다.</p> <p>실권을 손에 쥔 정도전은 행정, 군사, 외교, 교육 등 조선의 문물과 국책 대부분을 직접 만들었다. 수도 한양의 궁궐과 종묘의 위치에서 전각, 궁문, 도성 4대문 이름 등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외교 문서를 트집잡아 정도전을 소환하자, 그는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 이 때문에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또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방원을 변방으로 보낼 것을 건의했다.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방원은 격분해 1398년 &lsquo;제1차 왕자의 난&rsquo;을 일으켰다. 그는 송현방에서 정도전을 살해했다. 정도전의 무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1989년 서초동 우면산에서 정도전으로 추정되는 참수된 유골이 발굴됐다.</p> <p><br />&nbsp;<br />■피비린내 나는 정변에 희생된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p> <p><br />&nbsp;<br />세종 때 김종서가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개척하는 광경을 그린 &lsquo;6진 개척도&rsquo;. 야인 추장이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br />김종서(金宗瑞)는 1383년경 양광도(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절재이며, 1405년 문과에 급제했다. 세종의 신임을 받던 그는 1433년 북방에 파견돼 함길도(함경도)의 여진족을 물리쳤다. 그는 8년간 6진 개척을 지휘해 두만강 이남 국경선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lsquo;북방의 대호(大虎)&rsquo;라는 명성을 얻었다. 1452년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사망하고 열두 살의 단종이 즉위하자 정국을 주도했다. 어린 왕을 보필하는 수단으로 황표정사(黃標政事, 의정부 대신들이 결정한 인사에 황색 표시를 해두면 임금이 형식적으로 낙점)를 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단이 심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lsquo;계유정난&rsquo;으로 숨졌다. 그는 이날 밤 수양대군의 방문을 받았는데, 수양대군은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수하를 통해 편지 한 통만 전달했다. 김종서가 편지를 펼쳐보는 순간을 신호로 수양대군의 수하가 철퇴로 그를 내리쳤다. 김종서의 두 아들과 집안사람들도 살해당했다. 수양대군은 경복궁에 입궐해 단종에게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역모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자신의 집에서 당한 첫 공격에서 김종서는 사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며느리의 친정으로 피신해 입궐을 시도했지만, 수양대군의 수하들에게 발각돼 목이 잘렸다. 그는 시신도 수습되지 못했으며, 역사서 편찬 명단 등에서 삭제됐다.</p> <p><br />&nbsp;<br />KBS드라마 &lsquo;공주의 남자&rsquo;의 김종서<br />■궁지에 몰린 반정공신이 선택한 자멸의 낭떠러지, 이괄</p> <p><br />&nbsp;<br />MBC드라마 &lsquo;화정&rsquo;의 이괄(오른쪽)과 인조<br />이괄(李适)은 1587년 태어나 선조 말기 무과에 급제했다. 1622년 광해군으로부터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임명받아 부임 직전,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lsquo;인조반정&rsquo;에 가담했다. 그는 반정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도 뒤늦게 합류했다는 이유로 이등공신 한성판윤에 책록됐다. 후금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받아 국경 경비를 맡았다.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1624년 3월에는 외아들 이전이 반역죄로 무고를 당해 자신까지 위험에 처한다. 진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그는 3월13일 같은 혐의를 받아 한양으로 압송 중이던 한명련을 구출하고, 영변에 금부도사 고덕률이 도착하자 그를 살해했다. 인조 즉위 10개월 만에 발생한 &lsquo;이괄의 난&rsquo;이다. 그는 검술과 조총술이 뒤어난 항왜(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왜군) 출신 군사들을 활용해 관군을 대파하며 남하했다. 3월22일 부인과 장인, 동생이 한양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북방군이 한양으로 밀려오자 3월26일 인조는 공주로 도망쳤다. 3월29일 한양에 입성해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지만, 이틀 뒤 관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토벌군에 밀린 이괄은 4월1일 이천 묵방리에서 수하의 이수백과 기익헌이 배신해 한명련과 살해됐다. 이괄을 배신한 수하들은 그의 목을 들고 관군에 투항했다. 이괄의 난으로 북방 정예군 1만2000명은 와해된다. 3년 뒤인 1627년 &lsquo;정묘호란&rsquo; 당시 후금군이 빠르게 남하한 것은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에 투항해 길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p> <p>이괄에 관한 민간 설화도 있다. 이괄의 아버지가 왕후장상의 묏자리를 봐두었는데, 시신을 거꾸로 묻어야 효과가 있었다. 아버지는 &lsquo;청개구리&rsquo;같던 이괄에게 자신의 시신을 바로 묻고 도토리와 콩팥을 함께 묻으며 손금이 올라가면 그때 거사를 치르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이괄은 평소와 달리 아버지의 유언만은 지켜 바로 묻었다. 그는 손금이 올라가지 않자 칼로 손금을 찢고 거사를 벌였다. 나중에 관군이 아버지의 무덤을 파보니 거의 용이 되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도토리와 콩팥도 군사가 되다 말았다고 한다.</p>

<p><strong class="heading2">◇운동 전</strong></p> <p>운동 직전에 너무 많은 양의 물을 섭취하면 위가 팽창해 거북한 느낌이 든다. 따라서 운동을 시작하기 2시간 정도 전에 400~600ml 정도의 수분을 섭취하고, 운동 시작 15~30분 전에 300~500ml 정도 다시 섭취하는 것이 좋다. 알코올이 들어있거나 카페인이 포함된 음료로 수분을 보충하는 것은 최악의 수분 보충이다. 알코올과 카페인은 탈수를 유도하고 몸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이뇨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운동 전 뿐만 아니라 운동 중이나 운동 후에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p> <p><strong class="heading2">◇운동 중</strong></p> <p>운동을 하는 도중에는 수분이 몸에서 빠져나간다. 따라서 빠져 나간 수분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운동을 하게 되면 갈증이 생겨 한번에 많은 양의 수분을 보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양의 수분이 들어오면 위장에 부담을 줘 운동을 방해한다. 따라서 운동 중에는 한번에 많은 양의 수분을 섭취하는 것 보다 소량의 물을 여러 번에 걸쳐 섭취해야 한다. 일회용 종이컵으로 약 4분의 3컵 정도를 15~20분 간격으로 마시는 것이 좋다.</p> <p><strong class="heading2">◇운동 후</strong></p> <p>운동 후 우리 몸은 많은 양의 수분과 전해질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 따라서 운동 후의 수분 보충이 특히 중요하다. 운동 후의 수분 섭취는 운동 전, 운동 중에 비해 양을 제한할 필요가 적으므로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정도로 수분을 섭취하면 된다. 1~2시간 이상 장시간 격렬한 운동을 했다면 물 보다 스포츠 음료가 효과적일 수 있지만 일반적인 운동의 경우 굳이 스포츠 음료를 마실 필요는 없다. 스포츠 음료에는 수분과 전해질이 들어 있어 갈증 해소에 도움되지만 당분이 들어있어 운동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p>

<p><strong class="heading2">◇운동 전</strong></p> <p>운동 직전에 너무 많은 양의 물을 섭취하면 위가 팽창해 거북한 느낌이 든다. 따라서 운동을 시작하기 2시간 정도 전에 400~600ml 정도의 수분을 섭취하고, 운동 시작 15~30분 전에 300~500ml 정도 다시 섭취하는 것이 좋다. 알코올이 들어있거나 카페인이 포함된 음료로 수분을 보충하는 것은 최악의 수분 보충이다. 알코올과 카페인은 탈수를 유도하고 몸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이뇨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운동 전 뿐만 아니라 운동 중이나 운동 후에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p> <p><strong class="heading2">◇운동 중</strong></p> <p>운동을 하는 도중에는 수분이 몸에서 빠져나간다. 따라서 빠져 나간 수분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운동을 하게 되면 갈증이 생겨 한번에 많은 양의 수분을 보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양의 수분이 들어오면 위장에 부담을 줘 운동을 방해한다. 따라서 운동 중에는 한번에 많은 양의 수분을 섭취하는 것 보다 소량의 물을 여러 번에 걸쳐 섭취해야 한다. 일회용 종이컵으로 약 4분의 3컵 정도를 15~20분 간격으로 마시는 것이 좋다.</p> <p><strong class="heading2">◇운동 후</strong></p> <p>운동 후 우리 몸은 많은 양의 수분과 전해질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 따라서 운동 후의 수분 보충이 특히 중요하다. 운동 후의 수분 섭취는 운동 전, 운동 중에 비해 양을 제한할 필요가 적으므로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정도로 수분을 섭취하면 된다. 1~2시간 이상 장시간 격렬한 운동을 했다면 물 보다 스포츠 음료가 효과적일 수 있지만 일반적인 운동의 경우 굳이 스포츠 음료를 마실 필요는 없다. 스포츠 음료에는 수분과 전해질이 들어 있어 갈증 해소에 도움되지만 당분이 들어있어 운동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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