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결혼의 시초 - 수로왕과 허왕옥 결혼이 시사하는 바


<div style="font-family: 굴림,gulim; font-size: 9pt"><a style="text-decoration: none" title="필리핀 국제 결혼! 정말 사랑 할 자신 있습니까?" href="http://www.philgo.com/?cate=post_in&amp;action=list&amp;id=marry" target="_blank"><font color="grey">출처: <font color="#2c77e6">필리핀 국제 결혼</font> - 사랑 할 자신 있습니까? www.philgo.com</a></font> </div><br>&nbsp; <p><b><font color="blue">[*] 국제 결혼의 시초 - 수로왕과 허왕옥 결혼이 시사하는 바&nbsp;&nbsp;&nbsp; </font></b><br>&nbsp; <p><a href="http://siteapi.philgo.com/data/20110211104319_1195a7f8979edc635ee1ce91c6c2387e.png"><img style="border-bottom: 0px; border-left: 0px; display: inline; border-top: 0px; border-right: 0px" title="image" border="0" alt="image" src="http://siteapi.philgo.com/data/20110211104324_f0c5739e7b530c6c4ce8613231a4f4be.png" width="496" height="373"></a> <p>&nbsp; <p>건 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p>&nbsp; <p>“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p>&nbsp; <p>왕 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p>&nbsp; <p>유 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媵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p>&nbsp; <p>“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p>&nbsp; <p>“저 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p>&nbsp; <p>왕 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p>&nbsp; <p>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p>&nbsp; <p>... (중략)... <p>이 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p>영 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p>... (중략)... <p>왕 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p>- 『삼국유사』 「기이」 제 2 '가락국기' <p>위에서 나온 대로 허왕옥이 가야에 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한 사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여기에 보면 김수로왕이 왕위에 오른 후, 하늘이 점지해서 보내준 배필로 나오며, 서로 결혼하여 지내게 되지요.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가장 위에 있는 사진은 수로왕릉을 촬영한 것입니다. <p>허왕옥은 아유타국에서 왔습니다.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나라의 이름이지요. 이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인도와 중국 쪽으로 주로 보고있는데, 많은 연구자들이 주로 인도로 생각하고 있지요. <p>허왕옥이 인도인이라고 한다면 바로 당시의 혼인은 국제결혼이 됩니다. 당대에도 국제결혼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 시사하는 바가 많지요. 물론 유리왕이 치희와 결혼한 것도 한족과 한 것이기에 국제결혼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거리상의 진정한 국제결혼 다운 국제결혼이라면 수로왕과 허왕옥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지요. <p>허왕옥과 수로왕의 이야기가 나올만큼 가야는 외국과 여러모로 교역이 활발하였다는 것이며, 이러한 교역이 혼인으로까지 연결될 정도로 번성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그만큼 가야가 외국에 개방적인 나라였다는 의미도 되지요. <p>이러한 것은 '쌍어문'이라고 하는 문양으로 대표됩니다. 이 쌍어문이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에서 많이 보이기에 당대의 활발한 교역상황을 알 수 있고 이에 대해 쓰여진 책도 있지요. 하지만 이 쌍어문이 과연 가야시대의 것이냐에 대해 여러 의견이 많기에 확실하게 이것을 가지고 근거로 제시하기엔 조금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p>그리고 이때에 들어서 가야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말하곤 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지요. 가야시대의 탑이라고 전해지는게 있지만 이게 과연 가야의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불교는 그보다 더 이후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지요. <p>『삼국유사』에서는 김수로왕과 허왕옥은 사랑이야기를 서술해 놓고 있습니다. 전설이기에 그 사랑이 무려 140여년 동안 이어졌다고 하지요. 이처럼 허왕옥과 김수로왕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습니다. <p><br>&nbsp; <p> <hr style="border-bottom: #dddddd 1px solid; border-left: #dddddd 1px solid; border-top: #dddddd 1px solid; border-right: #dddddd 1px solid"> <center> <div style="text-align: center; width: 540px; font-family: 굴림,gulim; font-size: 9pt" align="center"><font color="#b800f4">필리핀 여성과 국제 결혼 중매, 알선, 소개, 권유, 회원 등록 등은 <b>인신 매매</b>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절대 비용을 주고 서비스를 받지 마십시오! 인신매매범으로 평생 감옥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font> <br>&nbsp; <p><a style="text-decoration: none" title="필고 - 필리핀의 모든 것!" href="http://www.philgo.com" target="_blank"><font color="#555555">필고 www.philgo.com 에 오시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font> </a></font></p></div></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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